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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루쉰공원(魯迅公園, 옛 훙커우공원) -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 의거지) -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大韓民國臨時政府舊址) -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장(中國共產黨第一次全國代表大會舊址) - 손문 고택(孫中山故居) - 신천지(新天地) - 인민광장(人民廣場) - 난징동루(南京東路, 남경동로) - 푸동

 

 전날 황푸강의 바람을 몇시간 동안이나 그대로 맞아서인지, 아니면 많이 걸어다녀서인지 몰라도 몸이 안좋았다. 기침도 조금씩 나기 시작하고 열도 오르고.. 그야말로 감기환자가 되서 사장님의 사업얘기를 들은 다음 약을 먹고 바로 취침에 들어갔다. 일어나서도 그다지 몸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여느날 처럼 사장님께서 문을 똑똑 두들기시며 식사하라는 말을 듣고서 일어났다. 그래도 밥은 먹고 나가야겠기에 일어났다. 아픈건진 모르겠는데, 방안에 아무도 없어서 살짜기 외로워지기도 하고.. -_-; 다음에는 꼭 다른 사람과 함께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밥은 역시 한국식 밥이다. 역시 멤버도 어제와 같았다. 사장님과 그리고 그 한국학교 선생님과 나 셋이서 밥을 먹었다. 아파서 밥맛은 별로 없었으나, 그래도 한국식 밥이라서 그런지 잘 넘어가더라. 맛있었다. 또 사장님과 선생님과 한국교포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났지만 그래도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조금 쉬다가 늦게 길을 나섰다. 10시에 민박을 나서서 걷기 시작하였다. 지도에서 보니 2호선 롱양루역에서 타고 가는것 보다는 조금 걸어서 6호선 베이양징루역(北洋經路)에서 지하철을 타는 것이 더욱 좋은것 같아 시도해 보았다. 물론 지도에서 보았을때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_-.. 하지만 상하이 무역센터 앞에서 웬 스님복장을 한 사람들이 나에게 시주를 요구해서 손사레 치면서 가는데 뒤에서 욕을 해대었다. 그때부터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계속 걸었는데, 6호선역은 나오지 않는거였다. 어라.. 지도에서 볼때는 정말 가까웠는데.. 결국 40분정도 걸어서야 베이양징루역에 다다랐고.. 나는 이제 지도에 속지 않기로 다짐을 하였다.

 

 첫번째 행선지는 루쉰공원이었다. 이 공원이 1905년에 처음 개장할때는 훙커우공원이었으나 1936년에 중국의 대문호인 루쉰이 사망하고 그의 묘가 이 공원에 생기면서 루쉰공원으로 바뀌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루쉰공원이라는 말보다 훙커우공원이라는 말이 더 익숙한데, 그 이유는 이곳에서 1932년 매헌 윤봉길 의사가 이곳에서 폭탄으로 의거를 하여 일본인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준 곳이기 때문이다. 베이양징루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스지다다오(世紀大道)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서 바오샨루(寶山路)역에서 다시 3호선으로 갈아탔다. 바오샨루역은 3호선과 4호선이 선로를 공유하기 때문에 4호선 열차에서 내려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면 3호선 열차가 오니 이동할 염려도 없다. 3호선 열차를 타고 1정거장을 가면 훙커우축구장(虹口足球場)역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루쉰공원과 가깝다.

 

 

 

 

(훙커우축구장에서 루쉰공원 가는 길)

 

역에서 고가로 넘어가면 축구장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훙커우축구장이다. 1955년에 처음 생긴 경기장이지만 그래도 증축을 하여 상해에서 가장 큰 축구장이라고 한다. 그리고 축구선수 드록바가 입단했다가 1달만에 나온 상하이 선화 구단의 홈구장이 여기다(;;;;;;;;;;) 그 규모에 감탄하면서 루쉰공원쪽으로 가보니 조그마한 놀이공원도 있었다. 그날이 청명절 연휴였던 관계로 사람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서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 놀이공원을 지나서 루쉰공원으로 들어가면 멀리 하얀색 건물이 보이는데, 바로 그곳이 루쉰기념관이다. 나는 맨 처음에 루쉰기념관과 루쉰고택이 같은 곳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루쉰기념관)

 

 루쉰(魯迅)(1881-1936)은 중국이 낳은 세계적인 대문호이다. 원래 이름은 저우수런(周樹人)이나 이 이름이 더 유명하다. 원래는 부유한집 자손이었으나 집안이 몰락하였고 그래서 학비가 무료인 해군학교와 철도학교에서 수학하다가 1904년 국비유학생으로 일본 센다이에 위치한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일본인의 차별대우와 학업보다 노는데 열중인 청나라 유학생들 덕분에 생각이 점점 바뀌었고, 강의 도중에 러시아 스파이로 잡힌 중국인을 그대로 참형에 처하는 일본인을 보면서 정신을 바꾸고 생각을 해야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의학을 하는 것보다 문학을 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내 의학전문학교를 그만두었다.

 한동안 동경에서 있으면서 동생인 저우쭤런(周作人)과 함께 번역일도 하였지만 1909년 중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돌아와서 교사, 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1912년 중화민국의 건국과 함께 교육부의 관료로 들어가 일하게 된다. 하지만 허무함에 빠져있던 그는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1918년 5월에 신청년지에 실린 광인일기(狂人日記)가 큰 주목을 끌면서 루쉰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 뒤에 아Q정전과 약 등 많은 작품을 내놓지만 사회는 그가 편안하게 글을 쓰게 놔두지는 않았다. 사회현상에도 관심이 많던 그는  사회활동에 참여를 하면서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녀야 했으며, 좌익작가연맹 설립에도 참가하였다. 우리나라의 대표 항일시인인 이육사는 1932년 루쉰을 만나고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곤궁하게  살던 그는 1936년 상하이 자택에서 55세에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야말로 중국의 대문호이자 엄청난 사상가였던 것이다.

 

 루쉰기념관으로 들어가는데 대만학생증을 보여주니 학생은 공짜라면서 그냥 들어가라고 하였다. 참 이런 것은 우리나라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면 크나큰 루쉰의 동상이 나를 맞는다. 오른손에는 담배를 들고 바위에 앉아 공상에 젖어있는 루쉰의 모습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곳에 오기전까지 그저 전공서적 한켠에서나 볼 수 있었던 루쉰이 정말로 나의 곁에 살아있는 것 같았다.

 

 

(감상에 빠져있는 루쉰 동상)

 

 

 

 

 

 

(루쉰기념관 내부)

 

 루쉰기념관 내부에 들어가니 루쉰의 여러 사진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그의 생애를 알 수 있었다. 한가지 특이했던 것은 기념관의 방마다 루쉰의 명언이 적혀져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루쉰이 평소에 쓰던 물건은 루쉰고택에 있는 모양인지 많이는 없었다. 하지만 여러가지 자료를 통해서 대문호 루쉰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루쉰기념관 안에는 내산서점이라는 책가게가 있는데, 루쉰이 한때 운영했던 서점 이름이 내산서점이었다. 그래서 아마 그렇게 지은듯? 나는 그곳에서 우표형태의 루쉰 사진 몇장과 몇개의 기념품을 살 수 있었다.

 

 

 

 

(루쉰공원 정경)

 루쉰기념관을 나와서 루쉰공원을 걸으면 많은 루쉰과 관련된 풍경을 볼 수 있다. 길 곳곳마다 루쉰의 생애를 재현해 놓은 루쉰동상이 있었다. 또 앞서 말했다시피 그날이 청명절 연휴여서 그런지 많은 인파들이 나와서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공원에 있는 표지판을 따라서 루쉰묘지로 가기 시작했다. 훙커우공원이 루쉰공원으로 바뀐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루쉰선생의 묘지)

 

 생전에 루쉰선생의 유언(가급적 빨리 매장할것, 기념행사 치르지 말것, 나에 대해 얼른 잊고 니네나 열심히 살것.)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중국의 많은 사람들과 세계의 중국문학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루쉰을 잊지 못한다. 지금도 루쉰선생 묘에는 저렇게 흰 국화꽃이 곱게 놓여져 있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뒤에는 공원측에서 관리한것 같지만 묘지 위에 놓여져 있는 저 국화들은 일반 사람들이 가져다 놓은 것이 분명하다. 이만큼 중국 인민들은 아직도 루쉰을 기억하고 있다.

 

 루쉰선생의 묘지 앞에서 간단하게 묵념을 한 다음 바로 윤봉길 의사 의거지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윤봉길 의사 의거지는 어느 곳도 표시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 후에 매헌(梅軒)이라고 되어 있는 곳이 윤봉길 의사 의거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과연 매헌이라는 이정표를 보고서 아 거기! 하고 찾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이 얼마나 있을까? 어쨌든 나는 의거지를 찾기 위해 루쉰공원을 계속 빙빙 돌았다. 약 30분간을 찾아다녀도 안나오길래, 시간도 없고 해서 아 어쩔 수 없구나.. 하고 돌아가려는 순간 하늘이 도우신 건지  한국 전통건물 모양의 매표소와 하나의 비를 보고서 이곳이 바로 윤봉길 의사 의거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입장료는 15원이었고 그곳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을 알리는 비와 윤봉길 의사 기념관 겸 사당인 매헌)

 

 한국땅이 아니라 중국땅에서 우리의 문화재를 지킨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임은 잘 알고 있으나, 그분의 기념관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만큼의 정말 1/100000도 못되는 것 같았다. 사당 내부에는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어서 봄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을씨년스러웠고 사진에는 잘 나와있지 않지만 매헌 뒤에는 공사중이었다. 그분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고 있는것 같지 않아서 너무나도 속상했다. 1층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니 그분의 업적에 대한 사진과 자료들 몇개가 있었으나 너무나도 작았다. 10평이 될까 말까했다. 관리는 제대로 되고 있는지 이곳저곳에 먼지도 쌓여져 있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 내부)

 

 윤봉길 의사(1908-1932)는 충청남도 예산 출신으로 원래 이름은 우의이다. 봉길은 별칭. 1918년 덕산에 있는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그 이듬해 1919년 3.1운동을 접하고 곧바로 학교를 그만두고 한학을 배웠다. 한학을 배우면서도 신학문을 배우기를 서슴치 않아 민족 잡지등을 구해서 보며 조국의 독립을 어렸을때부터 생각했던 소년이었다. 1926년 산책길에서 어느 글을 모르는 무지한 농부 청년이 주변 묘의 묘표를 다 뽑아가지고 와서 자신의 아버지의 묘를 찾아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그러나 묘표를 죄다 뽑아놓았기 때문에 그 아버지의 묘소를 다시는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불효를 저질렀다며 통곡하는 그 농부청년을 보면서 '무식이 나라를 잃게 만든 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윤 의사는 19세의 나이에 야학을 세우며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엄청난 노력으로 농촌계몽은 성공의 가도에 올라갔지만 윤 의사는 조국의 독립이 없으면 이러한 활동도 아무 필요가 없다고 깨닫는다. 1930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 는 글을 남기고 중국으로 망명한다. 칭다오에서 자신을 후원해준 월진회에게 빚을 앞기 위해 1년간 세탁소에서 일을 하였고 1931년 상하이로 가서 백범 김구선생을 만난다. 그리고 투쟁을 하기 위해 길을 모색하던 중에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승전기념식을 한다는 신문 기사를 본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은 기회가 왔다고 느꼈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3일 전인 4월 26일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민족적 차원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선서문과 편안한 미소의 사진을 찍게 된다. 그리고 3일 후에 의거를 결행하여 식민통치의 원흉들을 사살하고 중상을 입히게 만듦으로써 의거는 성공한다. 윤의사는 바로 잡혀서 1932년 12월 19일에 일본에서 25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러한 위대한 일을 하였던 의사님이신데, 의거터에 있다는 기념관은 매우 볼품이 없었다. 윤의사의 동상과 영정 그리고 한켠에 있는 우리 가카께서 찍은 기념사진, 그리고 가카께서 헌사하셨다는 2000달러의 금액이 달린 현판만이 빛날 뿐이었다. 바로 옆에 비치가 되어있던 윤 의사가 생애 마지막을 장식했다는 형틀을 고차해서 바라보니 정말 복잡미묘했다. 착잡한 마음으로 내려오니 매헌 뒤에는 기념품가게가 있었다. 수익금은 전부 윤의사 기념관 수리비용에 사용된다는 현수막이 거추장스럽게 걸려있었고 그곳에 있는 물건들도 정말 형편이 없었다. 한탄하고 있던 중에 북쪽 말을 쓰는 사람들이 왔다. 양복 오른쪽에 전부 붉은 딱지가 매달려 있는것을 보았다. 북한 사람들이었다. 음료수를 하나 사서 바로 나왔는데, 나오면서도 마음이 매우 편치 않았다.

 

 윤의사 기념관을 보고 훙커우 공원을 나서 루쉰고택을 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다녀와서 수빈이에게 물어보니 루쉰선생이 어렵게 살아서 골목골목 안에 있다는것이었다. 당시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밥을 먹으며 식당 주인에게도 물어봤으나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서 1시간 정도 계속 헤매다가 결국에는 찾지 못했다. 윤의사기념관의 일과 루쉰선생 고택을 찾지 못해서 기분이 매우 상했다.

 

 결국에는 훙커우에서 신천지로 향하기 시작했다. 신천지라고 해서 우리가 요즘에 사회문제로 심각하게 알고 있는 신천지증거장막성전(막장성전이라고 해도 될듯)은 아니다. 중국 상하이의 고풍스러운 까페거리를 신천지라고 하는데, 그곳에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가 있었다.

 

 3호선 훙커우축구장역에서 열차를 타고 상하이역(上海火車站)에서 1호선으로 갈아탄 다음에 2정거장을 지나 인민광장(人民廣場)역에서 다시 8호선을 갈아타고 1정거장을 지나면 라오서먼(老西門)역에서 다시 10호선을 갈아타고 한정거장을 가면(;;;;;;;;;;;;;;;;;;;;;;;;;;;;;;;) 신천지(新天地)역에 도착한다. 거리상으로는 가까운거리이나, 지하철이 복잡한 관계로 이렇게 3번씩이나 갈아타는 불상사를 -_-; 아마 단번에 가는 버스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출구로 나오니 주변의 여러 유적지를 알려주는 표시가 되어있어 찾아가기가 매우 수월했다. 이정표에서 임시정부청사까지는 1분정도 걸렸다. 하지만 임시정부청사가 골목 안에 들어가 있어서 밖에 임시정부청사라는 표시가 없으면 그냥 지나가도 모를 것 같았다.

 

 

 

(임정청사 입구)

 

옆에 있는 매표소에 가서 15위안을 주고 표를 끊었다. 의외로 사람들이 없는 모습에 놀라웠지만 그래도 우리의 선조들이 고생하신 곳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복장도 갖추고 들어갔다.

 

 

 

 

 

(임정청사 들어가는 골목과 입구. 맨 위에 나온 사진의 인물들은 밑에 이야기와는 상관 없는 사람들입니다.)

 

상해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3일에 출범하였다. 사실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상하이 임시정부 역시 여러곳으로 옮겨다녔는데, 이곳 임시정부는 그중에서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약 6년간 썼던 곳이다. 1992년 도시계획으로 헐릴 뻔했지만 한국정부에서 이를 문제 삼았고 결국에는 1993년과 2001년 두번에 걸쳐서 복원하고 보수하였다. 원래 맨처음에는 진짜 아무것도 없었다고 하던데;; 지금은 안에 들어가보니 밀랍인형도 있고 사진과 유물도 전시가 되어 있었다. 중국에서는 문화재나 박물관 내부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강력하게 규제 되어있기 때문에 안에서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다. (그 안에서 몰래 사진찍으시는 분들은 좀 자제해주세요..)

 

 문으로 들어가자마자 삐걱삐걱대는 나무판자 소리와 아주 비좁은 공간은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렇게 어려운 곳에서 애국선열들이 활동을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에는 그때 당시의 모습들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임시정부가 이런 골목길에 정부청사를 세웠던 이유는 비밀리에 활동하기 위함도 있지만 만일 일본군이 임시정부를 급습하였을 경우에 복잡한 건물 사이사이를 이용해서 달아나려 했다는 이유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유물들과 사진들을 보면서 감상에 젖어 있었는데, 갑자기 임정청사가 시끄러워졌다. 관광객들이 온것이었다. 그렇게 경건한 곳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어떤 어르신들은 큰소리로 '이렇게 선조들이 일구어놓은 나라를 빨갱이들이 팔아먹으려고 한다!'며 시국토론을 벌이고 계셨다. 더이상 있는게 어려워서 나오니까 뒤이어 나오는 사람들 중 젊은 사람 하나가 ' 아 시X, 볼거 X나 없네.'하고 큰 소리로 지른다. 임정청사가 무엇을 보려고 온 장소인가? 그리고 그런 장소에서 그렇게 욕지거리를 하면서 지나가야하나? 기념품 몇개를 사고 나오니 골목은 돗대기 시장이 되어 있었고 골목안과 입구앞 좁은 인도는 안개가 낀것 처럼 자욱했다. 아저씨들이 담배를 피면서 기다리고 있는것이다. 그곳 관리원이 이곳은 금연구역이니 나가서 피우시라해도 중국어를 못들어서 그러는건지 아니면 그냥 씹는건지 그대로 피고 있었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외국에서 한국사람인것이 부끄러웠다. 그 지역 주민들과 중국 사람들이 이러한 행동을 보고서 한국사람을 욕해도 우리는 할말이 없다.

 

 임정청사 관람을 마치고 고개를 푹 숙인채로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장을 찾아갔다. 임시정부에서 1분거리다. 제1차전국대표대회가 1921년에 있었으니 앞서 봤던 임정과 시대를 거의 같이했다. 바로 동아시아를 흔들 사건이 불과 1분거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오해할까봐 앞서 말하지만 나는 공산당을 찬양하는 사람이 아니다.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왜 그곳을 찾아갔느냐 하면 중국정치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써 그곳은 반드시 가봐야 할곳이기 때문이다. 중국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흐름이 이곳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방문을 한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 제1차당대회지. 건물이 이뻐서 웨딩촬영을 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중국공산당이 세계에서 가장 큰 정당이지만 (당원 8천만명 -_-) 창립시기에는 그저 조그마한 동아리 수준에 불과했다. 행동하는 지식인 열 몇명이 모여서 공산당을 창당하고 첫번쨰 회의를 가진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당시 상하이는 중국 내에서 가장 개혁적인 도시였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이곳 근처에는 초기 중국 공산당과 관련한 유적이 많다.

 

 중국 CCTV 다큐멘터리 '부흥의 길(復興之道)' (이 다큐멘터리는 EBS에서 6부작으로 방영된 적이 있다.)에서 보았던 초기 회의장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조그마한 탁자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몇개의 잔. 그곳이 바로 중국과 세계를 흔드는 핵이 되었다.

 

 

 

 

 

 

(건물은 참 예뻤다.)

 

뒤에 있는 전시장으로 들어가니 중국 공산당의 역사가 쭉 배열되어 있었다. 당이 당이다보니 자신의 과오는 그냥 어물쩡 넘어가는 (대약진이랄지.. 문화대혁명이랄지..) 태도가 보였지만 여러가지 모습으로 재현을 잘 해놨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상설전시관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 주은래)에 대한 것을 따로 전시하고 있었는데 중국 공산당의 역사가 모택동이 중심이 아니라 저우언라이 중심인 듯 싶었다. 중국 사람들도 저우언라이를 엄청 좋아하는지 그 전시관에는 사람이 바글바글 했다. 신기해서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가 거기 지키고 있는 공안이 너무나 크게 소리를 질러서 내부 사진은 찍지 못했다.

 

 바로 당대회지를 나와서 쑨원고택(孫文故居)으로 가기 시작했다. 쑨원(孫文, 손문)은 중국과 대만에서 공통적으로 존경받는 국부다. 남경에 있는 그의 묘가 중산릉이라고 표현되는걸 보면 그 대접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쑨원은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여러 곳에서 살았는데, 그 중 한 곳이 바로 이곳과 가까웠다. 계속 길을 걷는데 어느 순간 쑨원고택의 표지판이 사라졌다. 그래서 허둥지둥 대다가 길거리를 청소하시는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어보았는데, 이 곳에서 4블럭 정도 가다가 우회전 하면 나온다고 하시더라. 아무리 걸어도 나오지 않길래 긴장하면서 걷고 있는데, 드디어 이정표 등장! 오른쪽으로 길을 꺾으니 정말 거짓말 처럼 쑨원고택이 나왔다.  

 

 

(쑨원 고택, 지금은 개조되어 손중산기념관(孫中山紀念館)으로 쓰인다.)

 

고풍스러운 쑨원 고택은 3층건물로 되어있었다. 손중산은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지만 1912년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자리를 물려주고 남쪽으로 도망을 쳤다. 위안스카이가 얼마 못가고 죽자 중화민국에는 군벌들이 난립해서 혼란이 벌어지는데 이 때 손중산은 1917년 광동성에서 호법군 정부라는 정부조직을 탄생 시켰으나 그의 북벌론이 호응을 못받고 1918년 쫓겨났다. 손중산은 1919년 상하이의 조차지로 망명을 갔는데, 바로 그때 그가 살던 곳이다. 이곳에서 공산당과의 협상을 통해서 군벌을 토벌하는 목적의 제1차 국공합작이 탄생하였고, 군벌들을 토벌하기에 이른다. 광저우와 상하이를 오가며 살아가던 그는 1925년 광저우에서 국민대표대회를 위해 베이징으로 가던 중 간암으로 사망한다.

 

 

 

 

 

 

 

 

(쑨원고택 건물)

 

 쑨원 고택은 지금까지 갔던 상하이 건물 중에서는 가장 예뻤다. 안에는 개조가 되어 여러가지 전시물과 또 여러가지로 재현을 해두었지만 건물과 그 안에 있는 뜰이 상당히 예뻤다. 손중산 선생은 그곳에서 거닐면서 중국에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였겠지. 안은 상당히 미로처럼 되어 있었다.  손중산 고택을 나와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신천지는 원래 상하이 조차지중 한 곳이었다. 그래서 많은 서양식 건물이 지어졌으며, 서양의 문화가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1950년대에 없어지고 공동주택들이 지어져서 그러한 풍경을 잃었으나 2000년에 들어서면서 정책적으로 복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그 비싸다는 상하이에서도 땅값이 비싼곳 중 한곳이고 서울의 청담동에 비교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신천지는 아니니 그 문서를 찾아오신 분은 조용히 돌아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신천지 거리풍경, 사람이 엄청 많았다.)

 

 신천지는 물론 복원한 것이지만 옛날 상하이의 건물 분위기를 살리는 건물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고, 주변에는 쇼핑센터들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쇼핑을 하고 쉬고 있었다. 또 많은 외국인들이 노천카페에 앉아서 커피나 맥주를 한캔씩 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좋아서 나도 앉아 있으면 말을 걸어오지 않을까 싶어서 나도 커피를 시켜서 폼을 잡아봤지만 그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이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밤에가면 야경이 정말 일품이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그것을 왜 몰랐을까.. 그저 힘들어서 다리가 아프다는 생각밖에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쇼핑센터도 들어가봤지만 원래 쇼핑을 싫어하는 나는.. 음..

 

 커피를 다 마시고 신천지역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인민광장(人民廣場)으로 향했다. 원래 그곳에 있는 상하이박물관(上海博物館)에 갈 계획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버렸다. 결국에는 마지막 행선지인 난징동루도 걸어갈겸 쉴겸 해서 들른 곳이었다.

 

 

 

 

 

 

 

(인민광장 주변 풍경, 위부터 상해도시계획전시관, 인민광장 가는 지하통로, 상하이박물관, 상하이인민정부)

 

원래 공산주의 국가는 도시 중앙에 큰 광장이 하나 있다. 이곳에서 프로파간다 대회도 하고 행사도 하는 등 하는 것이다. 중국도 다를 것이 없다. 베이징에 천안문광장이 있고, 이곳 상하이에는 인민광장이 있다. 인민광장 주변에는 도시계획 전시관도 있고 박물관도 있는데, 전부 시간이 늦어 가지를 못했다. 그저 한시간 정도 상하이박물관 계단에 걸터 앉아 발을 쉬면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참 여러 사람들이 나와서 활동을 하더군. 이윽고 내일 다시 대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상당히 아쉬웠다. 다시 일어나서 상하이의 명동이라고 불리는 난징동루로 향했다.

 

 

 

 

 

 

 

 

 

(난징동루의 밤거리)

 

난징동루(南京東路)는 상하이의 중심거리이다. 오로지 사람만이 다닐 수 있고 양쪽에는 엄청나게 많은 백화점과 상점들이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명동과 흡사했다. 그저 차이점은 명동보다는 길이 넓다는것. 그리고 취미활동을 즐기는 인파가 매우 많다는 거였다. 한가지 특이했던 것은 길거리에서 사교댄스 동아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르신들이 나와서 춤을 즐기고 계셨다는거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길거리에서 별로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있다.)

 

 

(춤을 감상해 보자.)

 

 난징동루를 구경하고 다시 푸동으로 향했다. 숙소에 도착해 보니 오늘 왔다는 남자청년 2명이 와있었다. 중학교때부터 친구라는 그들은 그냥 무작정 상하이에 왔는데, 마침 이 숙소가 비어있어서 왔다고.. 사장님도 오랜만에 집에 청년들이 많아서인지 매우 좋아하시며.. 인근 KFC에서 닭날개와 닭다리 세트를 마구 시키셨다. 원래 사람들과 어울려서 노시는 것을 매우 좋아하신다고 한다. 덕분에 저녁은 닭세트로 공짜로 해결을 하였다. 참 숙소하나는 너무나도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상하이에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이곳에서 묵어보는것도 정말 좋을 것 같다. 홈페이지는 http://minbakdanawa.com/main/view.php?day=3&goodsno=832&staydt=&unit=2 .. (상해 이모네 민박이다. 홍보하는거다. 원래 홈페이지도 있었는데.. 연결이 안되네..)

 

4/3 푸동 - 상하이 푸동국제공항 (上海浦東國際機場) - 대만

 

 마지막날 일정은 잡지 않았다. 왜냐하면 비행기가 1시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11시에는 숙소에서 나가야했다. 첫날에 사장님께 한인마트를 가고 싶다고 하였더니 오늘 같이 가자고 하셨다. 덕분에 택시도 공짜로 타고 따무지광장에 있는 한인마트에서 여러가지 물건과 부탁받은 것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사장님과 헤어져서 푸동공항으로 향했다.

 

 

 

다시 자기부상열차에 오르니 4박 5일이 꿈같이 느껴졌다. 굉장히 길 줄 알았는데, 언제나 여행은 짧다. 사실 상하이에 갔다오기 전에는 여러가지 상황으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여행을 통해서 국민의 의무도 챙기고 머리도 휴식을 취한것 같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지금 이순간이 가장 자유로운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이 자유를 맘껏 즐기다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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