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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에서 3으로 넘어가는데 약 3개월이 걸렸습니다 -_-; 죄송합니다. 천성적으로 게을러서기도 하고, 타지에서 공부하는게 여의치 않다보니 하나둘씩 미뤄졌네요 ㅠㅠ 그동안 다녀온 곳은 꽤 있는데 ㅠㅠ 언제 다 정리하려는지 ㅠㅠ 지금부터 부지런히 올려보겠습니다!

 

4/1 푸동한인성당(금가항성당, 진쟈샹성당, 金家巷天主堂) - 노서문(라오시먼, 老西門) - 상하이문묘(上海文廟) - 상하이라오졔(상해노가, 上海老街) - 예원(豫園) - 와이탄(외탄, 外灘) - 황포강유람선 - 푸동(浦東) - 진마오따샤(금무대하, 金茂大夏) - 동방명주탑(東方明珠)

 

 전날 돌아와서 KFC 치킨을 저녁으로 때우고 아픈 다리를 주물러가며 방안에 있었다. 민박 사장님께서는 한국 라면도 있는데 (여기 민박은 라면은 무제한 공짜였다!!) 그것을 먹지 KFC 치킨으로 때우느냐 하셨지만, 웬지 같이 투숙하는 사람들에게 지장을 줄것 같아서 꾹 참았다. 그날 저녁에 칭다오에서 선생님을 하신다는 분이 다른 방에 묶으셨기 때문에 조금 더 조심스러웠다고 해야할까?

 

 어느덧 4월 1일의 아침이 밝았다. 그 전날과 마찬가지로 사장님께서 똑똑 문을 두들기시며 '식사하세요' 하는 소리가 알람이 되었다. 머리는 산발이었지만 그래도 나가서 밥을 썩썩 긁어먹었다. 사장님 뿐만이 아니라 그 선생님도 같이 밥을 먹었기 때문에, 중국 교민 사회의 여러모를 들을 수 있었다. 일단 상하이와 칭다오의 경제적 규모 차이를 들으니 놀랐다. 칭다오의 1년 방값이 상하이 푸동지역의 1달 방값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칭다오에 사는 교민의 자녀들도 상하이가 교육여건이 훨씬 좋기 때문에 고등학교 정도 되면 다 이곳에서 유학을 한다는 것 등등.. 참으로 놀라운 교민 사회였다.

 

 약 9시 30분이 되자 길을 나섰다. 바로, 10시 30분에 푸동한인성당에서 미사가 있기 때문이다. 상해에는 원래 신천지 쪽에 한인 성당이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푸동에 한인이 급증 하였기 때문에 상해한인성당에서 독립해서 푸동에 성당이 하나가 더 생겼다. 비록 둘다 별도의 건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주교 상해교구의 성당을 빌려서 하는 거지만 한인 신자들의 열의가 느껴졌다.

 

 홈페이지에서 2호선 상해커지관역에서 내려서 걸어도 되고 택시를 타면 기본요금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여 지하철역에서 내려 걷기 시작하였다. 지도로 봐도 그다지 멀지 않은 것 같고.. 하지만 이것은 나의 큰 오산이었다.

 

 

 

(상해커지관역에서 내리면 바로 나타나는 푸동신구 인민정부청사)

 

 상해커지관역에서 내리니 바로 위압적인 건물이 하나 나타났는데.. 바로 푸동신구 인민정부청사였다. 우리로 따지면 구청인데.. 구청치고는 엄청나게 컸다. 물론 중국의 정치시스템 자체가 인민정부청사라고 해서 인민정부만 들어가는게 아니라 인민대표회의, 정협까지 다 들어가기 때문에 그런거라고 생각하지만 인민정부청사와 그 앞에 펼쳐져 있는 엄청난 광장이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성당은 가도가도 나오지 않았다. 이러다가 미사고 뭐고 다 보지 못하겠군! 이라고 생각했다. 4월 초의 날씨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성당이 있다는 길로 찾아갔다. 40분 정도 걸었을까? 바로 성당이 있다는 길이 나왔다. 그리고 성당은 나를 맞아주었다. 이때 시각 10시 25분이다.

 

 

 

 

(바로 이곳이 푸동한인성당이 있는 진쟈샹성당(금가항성당))

 

 푸동한인성당이 위치한 진쟈샹성당은 한국 천주교와 엄청난 인연이 있는 곳이다. 바로 한국 최초의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1845년 바로 이곳에서 사제서품을 받으셨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가 탄생한 곳이라는 말이다. 원래 충청도 당진의 솔뫼라는 곳에서 태어난 김대건 신부님은 1836년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택받아 마카오로 가게 된다. 물론, 배나 비행기 이런것도 없었다. 그저 걸어서.. -_- 1836년 1월에 압록강을 건넌 그들은 1837년 6월에 광활한 중국대륙을 거쳐 마카오에 도착한다. 그 중간에 같이 길을 동행하던 신학생인 최방제는 풍토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다. 마카오에서 4년간 라틴어 등 여러 서양 교육을 받은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4년 부제품을 받았고, 그 중 김대건이 선택되어 1845년 8월 17일 천주교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페레올 주교에게 파리외방전교회의 신학교가 있던 이곳 진쟈샹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는 10월에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밀항했으며, 이듬해 6월 체포되어 9월에 순교하였다. 신부가 된지 13개월만의 일이었다. 그의 신학교 동기인 최양업 신부는 육로로 조선에 입국하려다 실패하였고 1849년 전편에서 보았던 상하이 쉬자후이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래서 저렇게 한글 현판으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경당이라는 것도 써져있으며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성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가 있다. 350년의 역사를 지닌 이 성당은 거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으나 이 곳이 신도시로 지정되어 재개발 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 당시에 한국천주교회에서 이를 보존하려고 갖은 노력을 했었으나.. 중국정부가 들을리가.... 없다... 어쨌든 이렇게 새로지은 성당에서 2010년부터 한인미사가 열리고 있었으니 그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

 

 

 

 

(푸동한인성당에서의 미사)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한국말 소리에 괜시리 기분이 좋았다. 성당안으로 들어가니 적지 않은 숫자의 교포들이 미사를 드리기려고 준비하고 있었으며, 때는 주님수난성지주일이었기 때문에 성지가지를 주었다. 오랜만에 드리는 한국어미사. 정말 기분이 좋았다. 미사가 끝날 무렵 신부님께서는 이 성당에 처음 오신분들은 일어나 보시라고 하여;;; 일어났다.. 같이 일어나신 분은 서울에서 관광을 오셨다는 노부부와 미국(;;;)에서 일때문에 오셨다는 장년의 신사가 일어나셨다. 신부님께서는 반갑다며 직접 우리들에게 악수를 청하시며 장미꽃을 한송이씩 나눠주셨고, 신자들은 박수로 화답해주었다. 미사가 끝나고 미국에서 오셨다는 그분은 자기도 대만에서 유학을 했었다며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시면서 돈을(;;;;;;;) 쥐어주셨다. 안받겠다고 한사코 거절했지만 유학때 생각이 나신다며 받으라고 하시는데 안받을 수가 있나. 매우 고마웠다.

 라오시먼에 가기 위해 지하철역을 찾으려고 신자분께 물어보니 지하철역까지 걷기에는 조금 거리가 되신다며 어짜피 자신의 집이 그 쪽이니 태워다 주시겠다고 하시어 9호선 양까오쫑루(楊高中路)역까지 편안히 올 수 있었다. 참으로 고마운 관광의 시작이었다.

 

 본격적인 셋째날 관광의 시작으로 라오시먼(노서문, 老西門)을 택했다. 상하이 시내에 있지만 20c 중반의 상하이 골목길의 정취가 가장 잘 나타나 있다는 곳이다. 책자에서 읽으니 곧 개발에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재개발에 들어갔으면 어떡하지 하고 두근반 세근반 지하철에 올라탔다. 9호선 양까오쫑루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루쟈빈(陸家濱)역에서 내려서 8호선으로 갈아탄 다음 한정거장만 가면 라오시먼(老西門)역이 나온다. 내려보니 설명과는 달리 높은 빌딩이 있고 건설현장도 굉장히 많았다. 아.. 재개발에 들어갔구나 하고 지도를 보니 지도 또한 복잡해서 답이 안나온다. 그래서 약간은 실망을 하고 라오시먼 안에 있다는 상하이문묘에나 가보자 하고 찾아가는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바라던 풍경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라오시먼은 2012년 4월 1일 이 시점에 재개발이 되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이다.

 

 

 

 

 

 

(바로 옆동네와 너무나도 차이나는 모습의 라오시먼 거리)

 

 나는 처음에 상해라면 높은 빌딩과 넓은 차도 그리고 휘향찬란한 패션의 사람들이 다닐 줄만 알았다. 하지만 꼭 그렇지 만은 않았음을 라오시먼에서 느낄 수 있었다. 좁은 길로 차와 오토바이가 다녔고, 노인들은 앉아서 쉬고 있었으며, 내 머리 위에서는 빨래들이 마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중국의 소도시나 옛 상해거리를 걷는 기분이었다. 상해의 휘향찬란한것만을 보다가 이런것을 보니 기분이 색달랐다. 또 길거리를 다니면서 보니 약 2층정도 되는 높이에 빨래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 또한 매우 신기했다. 연달아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지만 그런 사람이 많아서 인지 사람들은 관심도 없었다. 나는 이거리에 참 정이 갔다.

 이 라오시먼 거리 한 중간에는 상하이 문묘가 있다. 문묘랑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써 상하이 문묘는 그야말로 상하이의 대표 공자사당이자 가장 큰 공자사당이다. 길이 너무나도 복잡해서 계속 돌아다니다가 상하이 문묘라고 써져 있는 것을 보고 들어가려고 하니 관리자 할아버지가 막는다. 알고보니 상하이 문묘 곁에 있는 시장인데 오늘은 영업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께 '그럼 문묘는 어떻게 가나요?'하고 여쭤보니 모퉁이를 돌아서 계속 가다보면 문묘가 나온다고 말씀을 하셨다. 또한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외국인것을 아시고 상하이 문묘 뿐만이 아니라 다음에 갈 상하이라오쟈와 예원까지 어떻게 가는지 소상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상하이 문묘 안에는 헌책시장이 열려있다.)

 

 상하이 문묘 안으로 들어가니 내가 예상하던 풍경과는 아주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어서 놀랐다. 표를 끊고 들어가서부터 공자님사당인 대성전 앞까지 빈틈없이 헌책시장이 열려 있었다. 여러 소설집부터 1989년 판 타임지 등등 엄청난 양의 헌책들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문화대혁명 당시에 사용이 되던 모택동어록까지 포장이 뜯어지지도 않은채(!) 팔리고 있었다.. 오오.. 처음에는 공자님의 사당에서 돗때기 시장이 펼쳐지고 있어서 다소 난감했지만, 어짜피 책을 좋아하셨던 공자님이시니 상관 없겠다 싶었다. (하지만 누드집, 모택동 어록과 공자님은 좀 맞지 않은 듯 싶었다;;)

 

 

 

 

 

 

(수많은 인파 가운데.. 공자님께서는 흐뭇한 모습으로 앉아계셨다.)

 

 공자님이 모셔진 사당인 대성전 앞으로 갔다. 할아버지 몇분이 너무나도 편안한 모습으로 앉아계셔서 조금 쭈뼛쭈뼛 대었는데, 관리자 아저씨로 보이는 분께서 사진을 찍어도 되고 구경해도 된다면서 본격적으로 구경을 하기 시작하였다. 대성전 앞에는 큰 향과 촛불이 있었고, 그 뒤에 공자상이 너무나도 공손한 포즈로 헌책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으로는 사람들의 소망을 담은 카드가 매달려 있었고 대성전안에는 공자님 금상이 위치해 있었다. 공자께서 생전에 음악을 좋아하고 중시하셨는데, 그 때문인지 양 옆에는 편종과 편경이 자리잡고 있었다.

 

 1960~70년대 중국에는 문화대혁명이라는 광풍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그때 모택동의 사상에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면 모든것이 파괴되고 없어졌다. 서양의 문물은 말할 것도 없었고, 70년대 이후의 문화대혁명을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 린뱌오(林彪)와 공자(孔子)를 비판하는 운동이라는 의미)이라고 칭할 만큼 공자는 크게 비판받았고 제 2의 분서갱유라고 불릴 만큼 공자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나가고 있었다. 나는 수업시간에 크게 파괴된 공자상과 목이 뎅겅하고 잘려나간 공자상을 본적이 있는데, 그 사진과는 너무나도 다른 현재의 모습에 다소 당황스러웠다. 문화대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개혁개방이 도래하고 중국이 세계질서로 나가는것 그리고 인민을 단합시키는데 중국정부는 공자를 이용했으며 지금 중국은 공자를 너무나도 크게 숭배하고 있다. 아마 상하이 문묘도 문화대혁명 중에는 엄청나게 파괴를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중국정부의 노력(?)이 다시 상하이 문묘를 살려놓은 것 같았다.

 

 

 

 

 

 

 

 

(상하이 문묘 안쪽의 모습)

 

 상하이 문묘 안으로 들어가니 바깥과는 다른 세계에 있는 듯 싶었다. 바깥은 헌책시장이 열려 있었지만 안쪽은 엄청나게 고요했다. 이따금씩 상하이 문묘 안에서 책을 읽으시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보여 마치 도서관에 와있는 분위기였다. 그 안에는 잘 꾸며진 행랑과 초목들이 있었고 또한 수석들이 굉장히 많았다. 또한 명륜당 안쪽에는 옛날 문묘에서 경전을 가르칠때의 모습을 조금은 재현해 놓았다.

 

 

 

 

 

(상하이 문묘 안 연못의 모습)

 

 상하이 문묘 안에는 아름다운 연못도 있었다. 예쁘게 생긴 누각과 축축 처진 버들가지 그리고 그 안에서 노니는 붕어의 모습은 아 봄날의 풍경이 이런 것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곳에서 지친 다리를 조금 쉬면서 구경을 하였다. 다시 거리로 나올때 헌책시장에 들러서 기념이 될만한 책 몇가지를 사들었다. 20~30원 정도로 싸게 살 수 있었다. 아 물론 누드집은 아니다.

 

상하이 문묘와 라오시먼에서 내려서 걷기 시작하였다. 라오시먼에서 예원까지는 지하철 한정거장 거리지만 그래도 상하이시의 여러 모습을 보기 위해서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뭐 그다지 먼거리도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걸을 수 있다.

 

 

(상하이 거리, 길을 걷다보니 이슬람 사원도 나왔다. 오오.)

 

 라오시먼에서 상하이라오쟈로 향하는 길은 매우 특이한데 한쪽은 낮은 주택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렇게 집들이 좋아보이지는 않았지만 반대편에는 매우 높은 아파트들이 지어져 있었다. 육교에서 바라보니 마치 높은 빌딩과 아파트들이 라오시먼 지역을 에워싸고 있는듯 보여 아마 이곳도 재개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길을 걷다보니 이슬람사원도 나왔다. 청진사라고 하는 사원이었는데, 우리가 아는 이슬람 사원 같이 생기지는 않았다 마치 고풍스럽게 생긴 서양 건물 같은 느낌이었다. 건물에 아랍어로 무언가가 적혀있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갔을 수 있었다. 알고보니 이 청진사는 매우 오래된 이슬람교 사원이었다. 문은 굳게 닫혀 구경을 할 수는 없었지만 중국식 이슬람 사원을 보게 되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그 앞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더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계속 길을 걷다보니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았다. 그렇다. 바로 상하이라오졔에 도착한 것이다.

 

 

 

 

(상하이라오졔 풍경)

 

 상하이라오졔는 예원상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예원에 부속된 하나의 상권인 셈이다. 9시부터 20시까지 열린다고 하는데 나는 15시쯤 도착했다. 양쪽에 고풍스러운 중국 전통식 건물에 각종 상점에서는 먹을거리와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나는 조금은 전통스러운 거리를 꿈꾸고 찾아갔지만 별로 그렇지는 않았다. 각종 상점에서는 이미 내가 살 물건은 없었다. 물건도 중복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굉장히 비쌌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명하다는 만두집이 있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맥도날드에 둘러서 늦은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그런데, 어디선가 많이 본 교복들과 한국말 소리가 맥도날드를 장악하고 있어서 보니 부산의 모 여고에서 수학여행을 상해로 왔더라. 그래서 조금 반가웠다. 몇몇 학생들이 화장실을 찾길래, 화장실을 찾아주기도 하고 같이 밥도 먹었다. 대학생이라고 하니까 놀라더라. 그리고 대입을 앞둔 아이들이어서 그런지 이런저런 대학교 풍경도 설명해주고 헤어졌다. 조금은 실망스러운 상하이라오쟈를 걷다보니 성황묘라는 사당이 나왔다.

 

 

 

 

 

 

(옥황상제와 여러 신을 모신 성황묘)

 

 성황묘는 옥황상제와 여러 신을 모신 곳이다. 마치 대만의 천후궁과 같은 사당이라고 할 수 있겠다. 관광지의 한 중심에 있기 때문에 여기도 사람이 매우 많았다. 신기하게 바라보는 외국인들과 열심히 기도를 하는 중국인들의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고 향연기가 가득했고 빨간색 리본에 자신의 소원을 적어서 매달아 놓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나 많아서 제대로 된 관람을 할 수는 없었다. 성황묘를 나와서 예원으로 향했다. 예원은 아주 유명한 관광지이기 때문에 예원으로 향하면 향할 수록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예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관광지 구경을 하러 온거지 사람구경을 하러 온것이 아닌데...'이런 생각을 하며 예원으로 들어갔다.

 

 

 

(예원상권의 모습과 여러 기념품들)

 

 예원(豫園)은 1559년부터 28년간 지은 명나라 시기의 유적이다. 이곳의 주인인 반윤단은 사천성 부지사까지 했던 관리였는데, 1557년 은퇴한 후에 고향인 상해로 돌아온 그는 은퇴 이후에 머물 집과 정원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예원이다. 원래 아버지를 위해서 지었지만 아버지인 반은이 공사 10년만에 사망하여 사실상 반윤단의 노년을 보내는 거처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이 공사에 많은 재산을 투자해서인지 반윤단이 사망한 이후 반씨 집안은 몰락하였고 그 이후 주인이 몇번 바뀌기도 하고 때로는 학교로 쓰이기도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서 홍루몽의 대관원이 생각났다. 홍루몽의 작자는 이 예원을 보고서 홍루몽을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어쨌든 28년간 지었을 만큼 굉장히 아름다운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예원의 풍경)

 

 예원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각종 기암괴석들과 연못이 있었고, 반윤단이 좋아하는 극을 공연했다는 무대도 있었고, 폭격을 맞아서 불탔다는 나무도 있었다. 그 풍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내 정신을 혼란케 했다. 하지만 내 정신을 혼란케한 것은 또 다른게 있었으니.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예원의 길이 꽉 차서 이곳이 신도림역인지 예원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풍광을 보려면 좀 서서 가만히 구경을 해야하나 이러한 환경에서는 도저히 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예원은 상하이가 자랑하는 엄청난 곳이긴 하지만 나같이 조용한 풍경을 원하는 사람들은 적합하지 않은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은 전부 한국 사람이더라.. 부끄러웠다.

 

 어쨌든 지칠데로 지쳐서 예원에서 나왔다.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실망한 상하이라오졔와 예원의 모습을 회상하며 터벅터벅 고성공원이라는 곳으로 갔는데, 나는 그 실망을 잊을만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고성공원에서 바라본 푸동의 모습, 아 정말 눈물 날것 같이 감동스러웠다.)

 상해의 고성을 모티브로 한 공원을 걷다보니 내 눈에 나타난 풍경은 바로 멀리 보이는 푸동의 풍경이었다. 사람은 많았지만 사람들의 자유로운 풍경과 넓은 공원 그리고 멀리 보이는 푸동의 높은 건물의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곳에 앉아서 조금 쉬다보니 다니느라 긴장했던 다리가 풀리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와이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에 기뻤다. 그곳에 앉아서 약 40분을 있었다. 대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매우 평화로웠다.

 

 드디어 길을 건너 와이탄으로 향하였다.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4월이긴 했지만 조금은 싸늘했다. 하지만 와이탄과 황포강을 볼 수 있다는 마음으로 갔다.

 

 

 

 

 

 

 

(와이탄에서 본 황포강과 푸동의 광경)

 

 보자마자 나는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강건너 보이는 푸동의 풍경은 티비에서 본 것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넓은 황포강에 다니는 여러 배들과 그다음에 와이탄을 다니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보고 또 놀랄 수 밖에 없었으며 엄청나게 불어오는 강바람 마저 놀라웠다. 춥더라;;

 

 그 중간에도 많은 커플들이 웨딩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야말로 웨딩사진을 아무렇게나 찍어도 아름다울것 만 같은 풍경이었다. 또 한가지 놀라웠던 것은 푸동쪽은 저렇게 아름다운 빌딩들이 있는데, 반대편인 와이탄에는 더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유럽식 건물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와이탄은 20c 초반부터 유럽 각 나라의 조계지가 위치했던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종 유럽 양식의 건물들이 들어설 수밖에 없었고, 반대 쪽 푸동은 그저 한가한 어촌마을에 불과했다. 당시에 풍경을 머리속에 그려보자니 매우 어색했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 중국의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푸동이 경제개발구역이 되면서 발전을 시작했고 그리하여 현재와 같은 풍경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멀리 보이는 동방명주탑, 진마오따샤, 국제금융센터는 높기도 참 높았다.

 

 그 중에 은은하게 들려오는 종소리가 있었는데, 피식하고 웃었다. 처음에는 오오 종도 쳐주는구만 했는데, 그것은 바로 동방홍(東方紅)이라는 모택동 찬양곡을 종소리로 바꾼 것이었다.

 

(들어볼 사람은 들어보자. 앞부분은 짤렸다.)

 

 황포강변을 계속 걷다보니 여러가지 기념물이 나왔는데 처음에는 중국 상하이의 초대 시장이자 중국 10대 원수 중 한명인 천이(陳毅)의 동상이었으며, 또 한가지는 인민영웅 탑이었다. 천이는 1923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을 만큼 초기 지도자중 한명이었고 군인으로써 뛰어난 활약을 하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자 초대 상하이 시장이 되며 정계에 입문하였다.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말년은 좋지 못했지만 현재 천이는 상하인들에게는 아버지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천이의 동상과 인민영웅 탑)

 

 와이탄의 저녁 풍경을 보기 위해서 나는 끊임없이 기다려야 했다. 해는 점점 기울어져 가고 강바람은 춥게 느껴졌다. 그러던 중에 다리 황포강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다리를 건너게 되었는데 외백도교라는 다리였다. 알고보니 1906년에 지어진 이 다리는 조계지와 중국영토를 오가는 다리였다고 한다. 엄청나게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다리였다. 외백도교 옆에는 러시아 국기가 휘날리고 있는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상하이 러시아 총영사관이란다. 아주 전망 좋은 곳에 있었다.

 

 

 

 

(외백도교의 모습, 해가 져간다.)

 

 외백도교를 왔다갔다하면서 시간을 축내고 있었는데, 잘 보니 와이탄 쪽에 불이 하나 둘씩 켜진다. 편의점에서 만두 3개를 먹으며 더 기다리니 드디어 내가 바라던 그림이 나왔다. 정말 불켜진 와이탄은 감동의 물결이 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는 여기가 중국인지 유럽인지 착각을 할 정도로 아름다운 이 풍경을 눈과 카메라에 담기 시작하였다.

 

 

 

 

 

 

 

 

 

 

 

 

(불켜지면 너무나도 아름다운 와이탄의 풍경)

 

 해가 떴을 때는 멀리보이는 푸동쪽의 풍경이 멋있었지만, 해가 지고 나니 개인적으로 와이탄의 풍경이 더 멋있었다. 불이 켜진 고풍스러운 풍경은 정말로 매료되기에 충분했다. 물론 강 건너 화려한 푸동의 풍경도 장관이었다. 현대와 근대의 조화.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해지고 나서 푸동의 풍경)

 

 여기서 황포강을 건너는 방법은 세가지이다. 좀 걸어서 지하철을 타는 방법, 황포강 유람선을 타는 방법, 와이탄관광터널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지하철을 타기에는 야경이 너무나 안타까웠고, 와이탄관광터널은 좀 비용도 비싸고 책에는 커플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접었다. 결국 택한 방법은 황포강 유람선을 이용하는 것 이었다. 혼자 타는 유람선 조금 난감했지만 황포강의 풍경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에 주저없이 택했다. 그리고 유람선과 함께 각 관광명소로 갈 수 있는 통합티켓을 팔았다. 중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상하이 국제금융센터 전망대, 동방명주탑, 진마오따샤로 가는 티켓이었는데, 나는 진마오따샤로 택했다. 동방명주탑은 워낙 유명하고, 국제금융센터는 가장 높은 빌딩이니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고 택한 일종의 잔머리였다. 그래도 얼마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으니까.

 

 황포강 유람선에 오르니 역시 사람이 많았다. 한국사람도 많아서 순간 여기가 한국배인지 착각할 정도였다. 대기실 밖에는 황포강의 야경을 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고 나도 몇컷 찍었다.

 

 

 

 

 

 

(멀어져 가는 와이탄, 가까워오는 푸동!)

 

 선착장에서 내리니 진마오따샤까지 갈 방법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선착장 관리 아저씨보고 여쭤보니 좀 나가면 붉은색 1번 버스가 있으니 그거 타면 된다고 설명해 주셨다. 버스타러 가니 버스 아저씨께서는 이 버스는 동방명주를 가지 진마오따샤는 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어쩔 수 없었다. 멀리 진마오따샤가 보이니 그곳을 향해 걸어갈 수 밖에 길 좀 건너고 걸어가니 진마오따샤와 국제금융센터가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오오.. 그리고 비교적 가까워 버스같은것을 타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동의 높은 건물들 그리고 진마오따샤(좌)와 국제금융센터(우). 둘은 정말 마주보고 있다.)

 

 푸동의 높은 건물들과 그 중에서도 하늘 높이 솟아있는 진마오따샤와 국제금융센터는 정말 장관이었다. 중국 내 1위 건물(국제금융센터)와 2위 건물(진마오따샤)가 이렇게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하지만 이것을 보면서 인간이 하늘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노력은 끊임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마오따샤 안으로 들어가서 어디가 전망대로 올라가는 곳인지 한참 헤매다가 지하로 내려가면 매표소가 있다는 것을 듣고 지하로 내려갔다. 이미 그곳에는 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줄을 서 있었다. 아마도 청명절 연휴때문에 중국 곳곳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겠지. 그곳에서 중국인 관광객들에 섞여있다가 가이드 때문에 줄 순서가 강제로 뒤로 밀려버리는 굴욕을 겪었으나 그래도 진마오따샤에 올라간다는 기분에 즐거웠다.

 

 

 

 

 

 

(진마오따샤의 엘리베이터는 정말 무섭게 빨랐다. 귀가 삽시간에 멍멍해지더라.)

 

 진마오따샤는 1998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이때부터 2008년까지 중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중국인들이 '8'이라는 숫자를 좋아함에 따라서 88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운데는 여러 사무실도 있고 하얏트 호텔도 있다고 한다. 여러 정보에 의하면 동방명주탑과 국제무역센터와는 달리 지상에서 한번에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중국인 관광객들이 확 몰려나가는 바람에 넘어질 뻔했지만 그래도 굴하지 않고 진마오따샤의 구경을 시작하였다.

 

 

 

 

 

(진마오따샤에서 본 상하이 시의 야경 그리고 진마오따샤보다 높은;; 국제무역센터)

 

 사실 진마오따샤에서 바라본 상하이 시의 풍경은 생각외로 아름답지는 않았다. 또 유리도 이중으로 되어있고, 유리에는 심하게 지문이 남겨져 있었다. 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와글와글 대서 정신도 쏙 빠졌다. 하지만 이렇게 높은 곳에서 상하이를 바라본다는 것 만으로 참으로 축복받고 감동받을 일이었다. 진마오따샤에는 여러가지 기념품도 팔고 전시해 두었다.

 

 

 

 

 

(진마오따샤에 있는 우체통, 각종 전시물들 그리고 저런 전자 물개도 팔더라;;)

 

 진마오따샤에는 우체통이 있는데, 여기서 엽서를 쓰고 우표를 사서 엽서를 부칠 수도 있다. 가서 엽서를 사서 나도 나의 친구들, 그리고 부모님께 엽서를 써서 부치고 왔다. 지상 350m 상공에서 쓰는 엽서는 참 의미가 있겠지.

 

 그곳에서 한시간 정도 머물다가 내려왔다. 시간도 늦었고, 푸동의 밤거리를 걸어보기 위해서이며, 마지막으로 동방명주탑을 보기 위해서였다.

 

 

 

 

 

 

(푸동에는 정말 높은 빌딩이 많다. 어지러울 정도로)

 

 푸동은 괜히 푸동이 아니다. 아마 그냥 평범한 동네에 동방명주탑, 진마오따샤, 국제금융센터가 있다고 해서 뜨는 동네는 아닐 것이다. 중국 경제의 심장으로 수많은 회사의 아시아지사와 중국지사와 본사들이 너도 나도 푸동에 몰려있기 때문에 높은 빌딩이 어지러울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그 빌딩들은 저마다의 야경으로 나좀 봐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듯이 보였다. 나는 아름다운 야경의 건물들을 보며 놀라며 동방명주로 향했다.

 

 

 

 

 

(동방명주 탑과 그 근처의 풍경)

 

 동방명주탑은 사실 빌딩은 아니고 TV송신탑이다. 1991년에 착공하여 1994년에 완공된 이 탑은 지금은 국제금융센터의 1위 자리를 모두 내주었지만 그래도 상해에서 가장 잘 알려진 명소이기도 하다. 중국 내의 건축물 중에는 국제금융센터 다음으로 높은 곳이라고 하니 참으로 멋있었다. 일단 하늘을 찌를듯한 동방명주는 웅장했다.주변은 육교가 있었는데 다른 육교와는 다르게 둥근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아래로 차들이 지나가고 동방명주탑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참으로 웅장하기 이를데 없었다. 올라가고는 싶었지만, 이미 진마오따샤에서 상하이의 야경을 내려봤기 때문에 또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그냥 돌아왔다.

 

 4월 1일도 어느덧 저물었고, 지하철을 타고 다시 민박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사장님의 진지한 사업 이야기를 들으며, 상해의 세번째 밤도 어느덧 그렇게 저물어 갔다.

(다음은 상해 이야기 마지막 편입니다. 언제 올라올지는 모르지만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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