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펑의 일생
후펑은 1902년 11월 1일 호북성 참춘현의 작은 마을에서 두부 장사로 생계를 이어가던 가난한 장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장광인(張光人)이고, 그의 일생에서 주요한 글들을 대게는 胡風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하였다. 후펑은 열여섯 되던 해인 1918년에 ‘참주관립고등소학’에 들어갔으나, 5.4 운동일주년 기념 활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학교를 떠나게 되고, 다시 1921년 봄 무창의 계황중학에 들어갔는데 2학년 때 5.4 신문학작품을 접하면서, 사회에 대한 의식이 눈을 떴다. 이 시절부터 호풍은 문학혁명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혁명과 인간해방에 대해 조금씩 눈을 떠가던 호풍은 1923년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고 큰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그해 말 그는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하고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1925년 5 ․ 30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학생 운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그해 여름에 북경으로 도피하여 북경대 예과와 청화대 영문과등을 전전하였지만 이곳에서 문학 수업에 그다지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곧 중퇴하였다.
후펑은 1926년의 대혁명에 참여하였으나 혁명 실패 후 잠시 방황하다가 1929년 일본유학의 길에 오르고 2년 후 게이오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학업보다는 당시 일본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던 프롤레타리아문화운동에 더 몰두하였고 1931년에는 일본공산당원이 되어 중국 좌익 작가 연맹 동경지부에도 참여하였다.
1933년 일본에서 추방되어 귀국하였으며 상해로 돌아온 그는 곧이어 좌련의 선전부장 및 서기를 차례로 맡으면서 좌익문학활동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당시 좌련을 주도하고 있던 루쉰과 가깝게 왕래하면서 공산당의 문학정책을 좌련에 반영시키는 데 주력했다. 당시 후펑은 루쉰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리하여 이후 그는 루쉰의 문학을 정리 발전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37년 항일전쟁 발발 후 후펑은 상해에서 잡지 <칠월>을 창간하였는데 이 잡지는 내륙 각 도시를 전전하며 1941년까지 총 35기가 발행되었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중국현대문학사에서 가장 크고 강대한 문학유파 ‘칠월파’를 형성 및 발전시킴과 동시에 제2의 루쉰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뿐만 아니라 문예이론에 관한 그의 글이 소련에 번역 소개되어 중국의 ‘벨린스키’로 칭송되고, 미국에서도 그의 경력이 한 잡지에 소개될 정도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1941년 3월에는 항일전쟁 발발 이후의 글들을 모은 평론집 《민족전쟁과 문예의 성격》을 출판하였다. 1944년 12월에, 《칠월》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희망》을 창간하였다. 1945년에는 1941-3년까지의 글들을 모은 평론집 《在混亂裏面》를, 1946년에는 1944년 이후 주관론논쟁과 관련된 글들을 실은《逆流的日子》을 출판하였다. 또한 1948년《論現實主義的路》을 발표하였다. 1950년 8월에는 1946-8년 사이의 평론들을 모은《爲了明天》를 출판하였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후펑은 혁명문예이론가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1952년 『文藝報通信員內部痛報』제15기에「후펑 문예이론에 대한 몇가지 의견」이 발표되면서부터 그의 문예이론에 대한 비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주관논쟁과 관련되어 비판받으며 정신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는다. 신중국 수립 후 그의 유심론적 경향에 비판이 가해져 실각하고, 1955년 5월18일 반혁명집단의 우두머리로 몰려 투옥되었다. 이후 1979년 1월 석방되기까지, 또 실질적으로는 그가 쓴 반혁명죄에서 그는 무죄임을 1980년 11월에 공식적으로 선고받기까지 무려 25년 동안 작가로서의 자유와 한 인간으로서의 모든 자유를 제한당한 채로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명예가 회복된 후에도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1985년 6월 여든두세 해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 후펑 글의 특색
작가는 마땅히 자신의 제재를 잘 배태해야하고, 약간의 일을 보고 곧 써서는 안 되며 약간의 감상이 생긴다고 해서 곧 써서도 안 되고 먼저 이것들을 당신의 용광로 안에 넣어야 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예술상의 인식경계는 인식의 주체가 전체 정신활동과 대상물을 이용하여 교섭할 때에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심 집필자를 위한 창작담>
이 교섭의 과정은 바로 ‘용광로’에서 주조와 같아서, 그 중의 객체에 대한 주체의 선택과 삼투는 화학상의 화합과 비슷한 상호융합의 반응을 형성한다. 후에 후펑은 ‘연소, 비등, 화합, 융합, 규합’등의 비유를 사용하여 창작과정에서 작가의 두뇌에서 일어나는 ‘용광로’ 작용을 설명하였다. 이러한 비유는 모두 ‘주관정신’의 열렬함과 포만함, 주동성을 의식적으로 부각시킨 것이고, 객관적인 것은 바로 매우 활발한 ‘용광로’같은 ‘주관정신’의 주조를 통하여 작품의 내용으로 결실을 맺는 것이다.
또한 그는 ‘상상력’과 ‘감각력’을 작가가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재능’이자 창작의 ‘주조’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조건이라고 간주하였다.
작가의 상상작용은 잘 준비한 모든 생활재료를 주관의 용광로 속에 넣어 녹이고, 작가 자신의 견해와 욕구와 이상을 이 재료 속으로 침투시킨다. 상상력을 각종 감정 조절 능력을 자유롭게 비등시키고, 이러한 작용으로 말미암아 각양각색의 생활인상을 통일, 종합, 확대시켜 맥락이 있는 특정한 체계와 각종 장면과 인물이 뛰어오르는 소천지를 창조해낸다. -《호풍평론집》
그가 볼 때, 사상과 관념은 창작과정에서 외부적으로 주어져서는 안 되고 마땅히 작가 생활경험의 결과여야 하며, 작가의 정신면모를 결정하는 생활욕구로서 존재해야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주관 전투정신’은 이러한 요소들을 포함하며, 이로부터 작가의 다른 개성과 감성 색체를 고찰하였는데, 이는 동시대 다른 비평가들과 구별되는 이론적 특징이다.
후펑은 역대로 현실주의를 주장하였다. ‘체험 현실주의’는 우선 ‘현실주의’이다. 그는 현실주의를 말하면서 또한 체험을 중시하여 창작과정에서의 작가의 주관 능동 작용을 부각시켰다. 만약에 현실주의 문학의 공통적인 경향에서 다른 이론 창작에 대한 개성적 추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후펑의 이론에서 가장 특색 있는 것은 아마도 ‘체험을 중시’한다는 것이 될 것이다. 비록 창작에 대한 사상․관념의 지도를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체험’을 지고무상의 위치로 올려놓았고, 이성 사유와 대립시켰다.
3. 1930~40년대 후펑의 리얼리즘 문학
후펑은 부르주아 개성지상주의 문예관을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문예 비평 및 이론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 등의 기계론으로 문예비평을 시작하였지만 그는 루쉰으로부터 대변되는 5.4신문학 전통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1930년대 당시 신문학운동의 전통을 부정하고 맑스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세계관에 맞추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후펑은 이를 거부함으로써 ‘전형론 논쟁’, ‘주관론 논쟁’등이 벌어지면서 저우양 등의 당권파 이론가와 대립하였다.
1). 전형론 시기
1936년 후펑은 여러개의 평론을 쏟아내며 전형론 논쟁을 일으키는데 이는 그의 리얼리즘적 시각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주로 <전형과 유형은 무엇인가?>, <리얼리즘의 한가지 ‘수정’>, <전형론의 혼란>이라는 평론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된다.
예술가가 ‘전형’을 창조하는 작업에서, 상상과 직관으로 삶으로부터 얻은 모든 인상을 유해시켜야 할 뿐 아니라, 인생을 인식하고 인생을 분석하는 능력으로 삶으로부터 얻은 것을 본질적이고 진실된 것이 되게 해야한다. 그래야만 창조해낸 ‘전형’이 비로소 우리의 인식을 더욱 확대시키고 심화시킬 수 있게 된다. - <전형과 유형은 무엇인가?>
위의 후펑의 글과 같이 전형 창조의 궁극적 목적을 ‘인식의 확대와 심화’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는 ‘상상과 직관’을 운용해야하며, ‘인생을 인식하고 분석’ 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그가 인식론적 경향에서 충분히 탈피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인식을 중시하는 경향은 전형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추상화(보편화)를 중시하는 경향으로 이어지는데, 그는 전형화를 종합 또는 예술적 개괄이라고 일컬으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작가가 특징적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인물이 속하는 사회 군체로부터 각양 인물의 개별적 특징을 선취하여 이 특징들을 추상화시킨 후, 다시 한 인물 속에 구체화해야한다. 이래야만 전형이 된다. - <전형과 유형은 무엇인가?>
전형화 과정은 개별적 특징을 선취한 다음 추상화가 되어야 하며 구체적으로 만든다는 논리인데, 이는 과학에서의 이론화 작업과 비슷하였다. 그러므로 후펑은 전형의 보편성을 개념의 추상성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고, 특수성을 다른 범주에 속하는 전형과의 차별성 정도로 파악한다. 이러한 후펑의 전형론은 기본 개념에 대한 경직되고 단순 도식적인 이해에 기반함으로써 개념설정에 오류를 범하고 별다른 주목의 대상이 되지는 못하였으나, 1930년대 좌익문학운동에서 결여되어있던 창작 방법에 대한 고민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어 중국의 작가들이 문학의 창작방법에 관심을 두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후펑은 자신의 이론적 결함을 자각하면서 자신의 인식론적 한계를 극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 무렵 자신의 스승인 루쉰을 만나면서 국수주의적이고 사상중심의 모습을 벗어나 ‘주관적 진정성’을 통찰해 나가기 시작하면서 비판적 리얼리즘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2). 민족형식론 논쟁
후펑은 1940년 <민족형식 문제를 논함>이라는 평론을 내면서 민족형식론 논쟁에 불을 지피게 된다. 그는 이 글을 통해서 민족형식에 대한 종합적 이론화를 시도하였다. 특히 이 글에서는 “일부 반리얼리즘적 경향에 대한 비판의 요점, 아울러 루쉰 선생의 서거 4주년을 기념함.”이라는 헌사 형식의 글을 써붙였는데, 이를 통해서 그의 민족형식론의 기본 관점이 리얼리즘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민족형식 제기의 의의를 정의하는 순간부터 리얼리즘과 연계시켜 사고하고 있다. 즉, 문학운동은 민족 현실을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 정확한 방법이 요구되는데 그 내용과 방법을 보충하기 위하여 내용이 요구하는 형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민족 현실의 내용을 올바로 인식하는 문학적 방법이 리얼리즘인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는 문학의 발전 법칙에 대해 역사적, 철학적 고찰을 진행하였다. 여기서 문예의 발전은 ‘비약’과 ‘이입’이라는 특수성을 가진다는 것을 드러내는데, 이는 5.4 신문학 운동의 과정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5.4 신문학 운동은 봉건사회로부터 현대 사회로의 변혁이라는 사회 토대의 규정에서 자유롭지 않으면서도, 서양 문학의 요소를 ‘이입’받아 전통 문학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중국의 현대 문학으로 ‘비약’했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5.4 신문학 운동은 후펑의 논리의 구체적 근거가 되었다.
리얼리즘적 5.4전통을 기초로 삼아, 한편으로 대상에 있어 생동적 면모를 통하여 보다 깊이있게 민족의 현실을 파악하고, 한편으로 방법에 있어 국제 혁명 문예의 경험을 한껏 수용해야만, ‘신민주주의 내용’을 반영하기 위한 ‘민족적 형식’을 창조할 수 있다. - <민족형식 문제를 논함>
5.4 신문예의 리얼리즘적 전통을 기초로 하여, 민족의 현실이라는 객관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국제적 경험의 수용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민족적 형식’을 창조할 수 있다고 했던 그의 이론 체계는 ‘신문학’을 굳건한 토대로 삼고 있었다. 이러한 5.4 신문학을 통하여 현재와 과거의 부단한 교섭을 통한 발전을 인정하고 동시에 외부의 선진적인 것과 지속적인 교류를 통한 발전을 인정하였다.
3). 주관전투정신론
주관전투정신론은 후펑의 후기 비평사상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를 통해 후펑은 주관론자로 비판을 받았지만, 그는 리얼리즘의 기본 원칙에서도 벗어나지 않고 사회 투쟁과 정치투쟁을 문학의 모토로 삼은 것은 1940년대에 결핍했던 균형적인 이론가로써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후펑은 루쉰을 ‘리얼리즘적 전투정신’이 충만한 ‘위대한 전사’로 평가하였으며, 혈육의 세상에서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높은 실천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시각은 1949년 그의 몰락의 서막인 <연안문예강화>를 통하여 마오쩌둥과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4. 후펑 반혁명집단 사건
1). <연안문예강화>와 후펑
1942년 연안에서 마오쩌둥이 발표한 <연안문예강화>는 ‘문학의 정치적 도구화’, ‘인민에 대한 복무’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데 이는 강제력을 동반한 정치적 문예지도 방침으로 작용하였다. <연안문예강화>에서는 정치성과 예술성, 보급과 제고, 생활과 문예, 공농병과 지식인 등을 대립적인 범주로 이분법을 시키고 있고, ‘주요모순을 장악한 후 전면적으로 모순의 통일’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상은 문학을 정치의 한 도구로 포함시킴으로써 문학 자체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문건에서 마오는 지식인들을 계급적으로 교육하고자 하였고, 문학은 그의 한 도구일 뿐이었다. “만약 지식인이 공농민중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떠한 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명제처럼, 사상개조를 하지 못하면 어떤 작가든지 쁘띠부르주아의 모든 것을 선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해방구의 특수한 상황에서 나왔으므로 국민당통치지구에서 무조건적으로 수용되기는 어려웠다. 후펑은 이런 <연안문예강화>를 반대하였다. 그는 ‘인민에 대한 복무’라는 문구를 문제삼아 이는 리얼리즘을 보장해주지 않으며 오히려 대중생활 속의 낙후성에 함몰 될 수있다고 경고하였다. 이러한 인민화에 대한 부정은 후펑의 문학관이 고급문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며 리얼리즘을 수호하고자 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당권파에게 맹렬히 비판을 당했으며, 후펑은 이에 대한 항변으로 1948년 9월 <리얼리즘의 길을 논함>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연안문예강화를 옹호하고 절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세우려고 하였다.
2). 후펑 반혁명집단 사건
마오쩌둥과 근본적인 이견을 가지고 있던 후펑은 1949년 신중국 수립 이후에 많은 핍박을 받게 되었다. 제1차 문대회에 참석을 하지 못하였고, 1953년까지 직장을 배정받지 못하였다. 또한 1952년 3월부터 당권파들이 후펑의 문예사상을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그
대중운동 과정을 목도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인식하고 약 1년의 집필기간을 거쳐 1954년 7월 <해방 이래의 문예실천 상황에 관한 보고>(일명:삼십만언서)라는 장문의 보고를 당 중앙에 제출하였다. 이것은 해방 이후 중국의 문예가 거쳐왔던 상황과 일부 당권파 문예계 지도자들에 의해 당의 문예정책이 착오를 범하고 있던 내용이었다. 이 문건이 제출된 뒤에 당권파 문인들은 더욱 강렬히 후펑을 반당분자로 몰아갔고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자아비판서’를 제출하며 굴복하였다. 하지만 1955년 후펑의 제자였던 쉬우는 후펑과의 개인서신 백여통을 당에 제출하였으며 교묘하게 편집되어 《인민일보》에 후펑을 비판하는 핵심 자료로 공개되었다.
이에 따라 후펑은 반당, 반혁명 집단의 괴수라는 죄명으로 비판받고 숙청당했으며, 이 사건으로 그가 편찬했던 잡지 《칠월》과 《희망》에 작품을 발표했던 작가들을 포함하여 후펑과 관계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비판을 받고 숙청되었다. 이 사건으로 8,000명이 반혁명분자로 분류되었고, 작가 70명이 체포되고, 1,000여명이 자아비판을 하게 되었다. 후펑은 그 후 25년의 옥살이를 한 후에 1979년 석방되어 복권되었다.
4. 결론
후펑은 정치적이고 도구적인 문예관에 맞서 문학 본연의 리얼리즘을 지키려다가 정권의 비판을 받고 숙청되는 피해를 입었다. 그가 자신의 문학적 사상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1930년부터 1940년까지 그의 평론은 발전을 거듭해오면서 그간 정치와 사상에 잊혀져 있던 5.4 신문학 운동의 사상을 다시 이끌어 내어 순수 문학발전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1942년부터 절대적인 문예론이 되어버린 <연안문예강화>를 전면적으로 비판을 하지 못하고 그 권위에 굴복하였다는 점에서는 비판 거리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사상을 정면적으로 이야기 하지 못하고 <연안문예강화>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밑에서 자신의 리얼리즘 사상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하는 행위는 오히려 후펑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는데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비록 당시와 같은 시기에 후펑과 같이 잘못된 사상을 비판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자신의 사상을 지키려는 지식인의 모습이다. 이러한 후펑의 모습을 보면서 요즘과 같이 정권의 압제에 자신의 주장을 함부로 표출하지 못하고 오히려 숨기거나 정권과 뜻을 같이 하려 하는 지식인들의 모습이 매우 불쌍하게 느껴진다. 이를 통해서 문예, 사회 전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맘대로 표출하여 어우러질 수 있는 세상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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