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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1 : 국립고궁박물관(國立故宮博物館) - 타이베이시립미술관(臺北市立美術館)

07/22 : 대만한인성당(臺灣韓人天主堂) - 임어당고택(林語堂故居, 린위탕고택) - 타이중


 앞선 포스트에서 말했다시피 이번 여행은 여행의 목적도 있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영주와 만나 배웅하는 자리의 의미가 더 컸다. 그래서 21~22일에는 많은 곳에는 가지 않고 간단히 몇 군데만 돌아다녔다. 또 너무 더워서 그렇게 돌아다니기가 싫더라... 하지만 귀찮음을 무릅쓰고 약속시간 12시에 맞춰 타이베이 시청역에 나갔다. 아직까지 타이베이는 지하철이 완벽하게 개통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쏭산기차역에서 시청역으로 나가려면 좀 답이 없었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이 걸어서 20분 거리였으니.. 그냥 택시를 타는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택시로 이동하였다.


 영주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지하철을 타고 스린역(士林)역으로 이동하였다. 다시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고궁으로 이동하였다. 고궁박물관은 두번째 방문하는 것인 만큼 오히려 되게 익숙했고, 오히려 타이베이에서 살았던 영주는 처음 와서 굉장히 신기해 하였다. 날씨도 맑아 전에 찍었던 사진 보다 훨씬 잘 나왔다. 국립고궁박물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http://ksejinism.tistory.com/120 포스트를 참고하면 된다.




(엄청 맑고 더운 날 고궁박물관의 모습, 그리고 그 앞에서 한 컷)


 토요일 오후의 고궁박물관은 역시 사람이 많았다. 같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유물들을 돌아봤는데, 약 2시간 정도 도니까 각 관광객들에게 기력이 빨린듯 정말 힘들었다. 역시 고궁박물관은 평일 오전에 와야할 것 같다.


 결국 다시 버스를 타고 고궁박물관에서 내려와 스린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허기진 우리는 만두집에 가서 만두를 먹고 전철을 타기전에 편의점에 들러서 맥주를 한캔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 힘들어서 돌아다니지를 못하겠더라.


 스린역에서 신디엔(新店)이나 대만전력공사(臺電大樓)역 방향으로 두정거장만 내려오면 위엔샨(圓山)역에서 하차하여 위엔샨축구장(遠山足球場)방향으로 나와서 공원을 가로 지르면 타이베이시립미술관에 도착한다. 그 중간에는 놀이공원도 있어서 가고는 싶었지만 너무 아동대상의 공원이라(;;;) 우리가 타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타이베이 시립미술관)


 타이베이시립미술관은 매우 깔끔하게 생긴 하얀 벽과 유리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1983년에 지어졌다는 건물 답지 않게 너무나 세련되게 생겨서 깜짝 놀랐다. 또한 미술관 주변에는 부조작품이 설치가 되어 있어서 미술관의 멋을 한층 더 되새겼다.


 중소기업제품 전시장을 지나 본관으로 들어가니 두가지 전시회를 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먹으로 그린 추상화 전시회였고, 하나는 생활 모습을 간간히 담은 회화 전시회였다. 겉에서 봤을때는 과연 사방으로 통한 곳에서 전시회를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되었지만 전시회장은 사방이 막혀 있어 작품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또한 시립미술관 안의 카페의 차가 매우 맛있었다.


 나와 영주는 시립미술관 로비로 나오면서 매우 놀랐는데, 바로 로비의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창문이 마치 캔버스가 된듯한 타이베이시립미술관 로비)


 창문으로 바깥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는데, 마치 창문이 큰 캔버스가 된 모습이었다. 화창한 날은 정말 그림으로 그릴 수 없는 그런 풍경이 고스란히 창문에 담기고, 흐린날은 흐린날의 모습이 고스란히 창문에 담기는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가장 훌륭한 작품은 바로 자연이 아닐까? 타이베이 시립미술관의 모습은 바로 나에게 그런 것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박물관과 전시관을 보고 오니 시간은 어느덧 6시가 되었더라. 타이베이 시립 미술관 근처에 쏭산공항이 있는지라 우리 머리 위로 비행기가 너무 낮게 날았다. 그것을 굉장히 신기해 하면서 다시 타이베이 101로 향했다. 그곳 딘타이펑에서 밥을 먹고, 동네 포장마차 같은 술집으로 옮겨서 또 술을 12시까지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윽고 마지막날 아침이 되었다. 전날 에어컨을 너무나도 세게 틀고 자서 감기기운이 좀 돌았지만 그래도 밥을 먹고 커피까지 한잔 마시니 기분이 좋았다. 짐을 싸고 호텔을 나섰다. 첫번째로 갈 곳은 바로 한인 성당이었다. 타이베이에 한인성당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차마 가지는 못했고 학교에서 중국어, 영어미사만 드리다보니 한국어 미사도 그리워졌다. 그래서 위치를 수소문 해서 한인성당에 가보게 된 것이었다. 미사시간이 11시 반이어서 조금은 천천히 이동을 하였다.


 지하철 샨다오스(善導寺)역에서 린싼베이루(林森北路)방향으로 나와 약 10분을 쭉 걸으면 고풍스럽게 생긴 교회건물이 하나 보인다. 물론 그곳은 성당이 아니라 역사가 오래된 장로교회라고 한다. 그곳에서 길을 건너면 조금은 중국식으로 고풍스럽게 생긴 곳이 있는데 바로 그곳이 한인성당이다.



(이렇게 생겼다.. 성당같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철문에 '대만한인성당'이라고 씌어있고 미사시간이 적혀져 있으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드리는 한국어미사.. 정말로 감격 스럽다. 이곳은 원래 창안성당(長安天主堂)으로써 천주교 타이베이대교구의 성당이나 여느 외국의 한인성당이 비슷하듯, 이 성당을 일정시간 빌려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전 대만에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한국어미사를 드릴 수 있다. 한인성당은 이곳밖에 없기 때문에 ㅠㅠ (미사시간은 일요일 11시 반, 목요일 10시라고 하니 참고하기 바란다.)



(대만한인성당 미사 중..)


 성당에 들어가니 다른 곳은 공사중이어서 조금은 어수선했다. 그리고 성당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작았고, 신도는 약 30명 정도 모였다. 처음에는 한인성당의 청년회장인듯한 형제님이 오셔서 새로 오셨냐고 어디사셨냐고 묻는데, 타이중에 산다고 하니 매우 애석해 하셨다. 학교가 타이베이에 있었으면 성당에 매주 나와서 봉사도 하고 재밌게 지낼 수 있었는데.. 참 아쉬웠다..


 이윽고 백팩을 매신 신부님께서 들어오셨고 미사가 시작되었다. 외국어가 아닌 우리의 모국어로 드리는 미사가 그 얼마나 아름답고 감격스러운지 모르겠다. 또한 대전교구에서 파견된 신부님께서는 상당히 강론도 재밌게 하셔서 신자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고 있으신듯 했다.


 미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새로 온 신자들이 나와서 인사를 하는데 나도 우연히 껴서 인사를 하게 되었다. 조금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그래도 굉장히 즐거웠다. 그 후에 한 가족이 중국 선전으로 떠나게 되었다고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약 그곳에서 10년을 사시며 활동을 하셨다는 그 가족은 아쉬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고 신자들도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해외의 한인 성당에 작은 한인 공동체였으니 떠나가는 것이 얼마나 아쉬웠을까? 


 미사를 마치고 중화권의 대문호인 임어당(林語堂)의 고택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임어당(林語堂, 린위탕, 1895~1976)은 중화권의 학자이자 소설가, 문명비평가 이자 발명가이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중국 복건성에서 태어난 그는 상해 성요한대학을 졸업한 후에 1919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하고 1921년 독일로 건너가서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23년 베이징대학 영문과 교수로 임용되면서 돌아온 그는 루쉰(魯迅)과 뜻을 같이하여 문화평론을 쓰는 등 여러 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수없는 수필을 쓰면서 자신의 긍정적인 생각을 그대로 표출하였고, 1936년 영국으로 건너가 영어로 수필을 쓰면서 중국 문화를 알리곤 하였다. 바로 당시의 대표작 중에 하나가 『생활의 발견』이다.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지지하며 활동하던 그는 일본이 몰락한 뒤에도 중국 본토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철저하게 국민당 정부를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홍콩과 미국, 영국을 오고가면서 계속 작품활동을 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고, 결국 1960년대에 장개석이 그를 불러들여 양명산 밑에 집을 지어주고 그곳에서 살게 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에 맞는 타자기를 만드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결국 1976년 타계하게 되었다.


 임어당 고택을 가려면 조금 복잡하다. 고궁가는 버스를 타다가 동오대학 앞에서 버스를 갈아타는 방법이 있고, 그냥 스린역에서 택시를 타고 가는 방법이 있었다. 나는 그냥 후자를 택해서 임어당 고택에 도착하였다.




(임어당 고택)


 임어당 고택은 마치 그리스 가옥처럼 지붕은 짙은 파란색으로, 벽은 하얀색으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양명산 자락에 이렇게 예쁜 가옥을 볼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들어가면 조그마한 마당이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곳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자리잡고 있었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허둥지둥하니 개량식 중국전통복장을 입은 안내원이 와서 도와주었다. 가방은 입구에 맡기고 안내원이 나를 데리고 이곳 저곳 안내해 주기 시작했다. 어리게 생긴 여자 안내원은 내가 한국인인 것을 알고 조금은 당황한 눈치로 영어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중국어로 알아듣는다고 했지만 안내원은 자기도 영어로 설명해보기는 처음이지만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라면서 계속 영어로 설명하였다... 나는 또 답변을 계속 중국어로 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졌다.







(임어당 고택 거실)


 임어당 고택의 거실로 이끌려 들어가니 임어당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임어당이 보았던 책들과 사용했던 책상, 의자, 소파 등이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그가 즐겨 먹었다던 사탕이 담겨 있던 고풍스러운 통과 그가 개발했던 중국어 타자기 또한 전시가 되어 있었다.





(침실)


 침실 역시 그가 썼던 모양새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침대와 의자, 그의 옷까지 볼 수 있었는데, 한가지 이상했던 점은 침대가 큰침대가 아니라 1인용 침대였다는 점이다. 안내원은 이것을 퀴즈로 내었고, 나는 갖가지 상상을 다 했는데 안내원이 말하길 임어당 자신은 아침이 되서야 잠이 들었고, 임어당의 아내는 저녁에 잠을 잤기 때문에 임어당의 아내가 일어나면 임어당이 취침에 드는 식으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침대는 싱글침대 하나만 이용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획기적인 생각인가! 참 그의 재치에 너무나도 감명을 받았다. 침대옆 침대장에는 부부의 사진이 전시가 되어 있었는데, 임어당은 그의 아내를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응접실에 전시된 그의 작품과 유품)


 그는 심지어 서예와 그림, 전각까지 섭렵을 했는데, 응접실에는 그가 쓰고 그렸던 작품들이 전시가 되어 있었으며, 그의 유물들도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의자에 이상한 새무늬 같은 것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임어당이 그의 아내를 위해서 직접 만든 하나의 마스코트였다. 가구마다 그 마스코트를 직접 새겨서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전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윽고 안내원은 나를 데리고 집 뒤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보니 타이베이의 고급 주택가로 불리는 톈무(天母)가 한눈에 보였다. 안내원은 임어당은 고택에서 보는 톈무의 모습을 그렇게 좋아했다고 말하며 결국 죽어서도 이곳에 묻혔다고 전했다. 바로 고택 뒤에는 임어당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임어당 고택에서 본 톈무와 그 모습을 좋아했던 임어당 선생 지묘)


 참으로 그는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생전에 긍정적으로 살았는데, 죽어서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풍경을 앞에 두었으니 그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내가 임어당을 좋아하는 이유가 율려한 필치 이런 것이 아니라 항상 긍정적이고 유머스러움이 남아있는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행복 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 처럼 내가 주어진 사실에 정말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살아야 할텐데.. 임어당 선생 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도 내 주어진 삶에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알고보니 임어당 고택은 정부나 시에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동오대학이라는 학교에서 관리를 하고 있었다. 안내원 자신도 거기 학생이고 일주일에 3번정도 나와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곳에서 일을 하는 안내원도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임어당 고택 한켠에는 기념품점과 카페가 같이 있는데, 그곳에서 톈무를 바라보며 먹는 냉 우롱차는 정말 맛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많은 곳은 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의미있는 곳을 갔다는 생각을 하니 정말 기분이 좋았고 즐거이 타이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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