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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臺北)는 여러모로 큰 의미가 있는 도시이다. 옛부터 대만의 가장 중심적인 도시였고, 1949년 이후로 중화민국의 수도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여러 역사가 혼합되어 있는 도시기도 하다. 그리고 어느나라나 그렇듯이 그 나라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수도이기도 하다.


 이전부터 타이베이는 꼭 가보고 싶었지만 여러가지 사유로 인해서 갈 수가 없었다. 여러 학업에 바쁘기도 하고 2시간의 거리가 조금은 귀찮기도 하였다. 학교 앞에 타이베이로 바로 갈 수 있는 버스가 있음에도 말이다. 방학이 시작되었고, 어디 갈 곳이 없을까 찾다가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타이베이에 가기로 하였다. 더구나 영주라고 하는 학과 동기가 타이베이 101의 한 기관에서 인턴으로 일을 하고 있었기에 여행도 할겸 동기도 만나서 제대로 된 술도 마실겸(;;;) 타이베이에 가기로 하였다. 뉴스에서는 타이베이의 온도가 39~40도를 오간다고 겁을 주었지만(대만에서 여름에 가장 더운 곳은 의외로 남쪽이 아니라 타이베이이다. 그 이유는 대구와 같은 분지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벼운 마음으로 짐을 싸서 여행길에 올랐다.


6/29 : 숙소(타이베이 101 인근) - 타이베이역(臺北車站) - 국립대만박물관(國立臺灣博物館) - 228화평공원(二二八和平公園) - 228기념관(二二八紀念館) - 중화민국 총통부(中華民國 總統府) - 경복문(慶福門) - 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 - 소남문(小南門) - 시먼딩(西門町) - 시먼 홍루(西門紅樓) - 박피료노가(剝皮寮老街) - 용산사(龍山寺) - 숙소


 여행을 계획했으면서도 숙소를 구하지 못했었다. 마침 타이베이에서 일을 하고 있는 영주가 도움을 주어 타이베이 101 근처에 숙소를 구하게 되었다. 여관정도 되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비교적 깨끗하고 일단 타이베이 101근처에서 가장 싸다길래(1박 NT$1,100) 전화로 예약을 마치고 바로 타이베이에 올라갔다. 


(고속전철 타이베이역, 반차오부터 난깡까지 타이베이를 관통하는 철로는 지하화 되어 있다.)


(타이베이 시청역(市政府站))


 고속전철 타이베이역에서 내려서 올라오니 엄청나게 복잡했다. 일단 고속전철과 일반철도, 그다음 지하철 담수선과 반남선이 교차하고 바로 앞에 버스터미널까지 있어서 매우 복잡했다. 숙소를 가기 위해서는 타이베이 시청역까지 가야했다. 파란색 선인 반남선을 타고 7~8분쯤 가면 타이베이 시청역이 나온다. 


 숙소를 가기 위해서 영주가 카톡으로 보내준 지도를 보며 숙소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거리를 보니 버스가 있을 것 같았지만, 버스 노선을 알수가 없어서 걷기로 했다. 


(숙소 가는 길에 본 타이베이 101)


 더위에 헉헉대며 15분정도 걸었을까 높은 빌딩 숲 가운데 특히나 높은 빌딩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타이베이 101이었다. 말로만 듣던 타이베이 101을 이렇게 볼 수 있다니.. 조금은 감동이었다. 타이베이 101을 지나 다시 10분쯤 걸어가니 숙소가 나타났다. 카운터에 있는 중년의 아줌마는 한국인이라고 하니 매우 반가워 하시며 한국 드라마 좋아한다고 한국말을 몇마디 하시더라. 하하.


 숙소를 나와 본격적인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먼저 향한 곳은 타이베이역이었다. 그곳에서부터 걸어서 타이베이 시내를 구경할 계획이었다. 원래 타이베이에는 타이베이성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 성내에 시내가 발전이 되었기 때문에 현재도 타이베이청중(臺北城中, 대북성중)이라고 불리며 지금도 타이베이 뿐만 아니라 대만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타이베이역)


(타이베이 역 앞 관첸지에(館前街, 관전가)


 앞서 설명했다시피 타이베이역은 타이베이에서 가장 복잡한 곳 중 하나였다. 각종 철도와 지하철, 버스터미널 뿐만 아니라 지하상가가 넓게 자리잡고 있고, 바로 앞에는 대만에서 가장 큰 백화점 체인인 신광삼월(新光三月, 미스코시) 백화점이 있고 상업구역이 넓게 자리잡혀 있어 엄청 복잡하다. 길을 상당히 잘찾는 나도 잠깐 헷갈려서 타이베이역 지도를 보고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먼저 228화평공원으로 가기 위해서 관첸지에쪽으로 나갔는데, 좁은 길에 엄청난 양의 사람들 그리고 차들을 보고서 정말 복잡한 시내 한복판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또한 이 관첸지에 골목이 대만에서 가장 유명한 학원가 중 하나였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노량진 정도 되는 포지션을 가지고 있었다. 약 50m정도 걸으니 고풍스러운 건물이 하나가 나왔고, 그곳이 바로 국립대만박물관이었다. 




(228 화평공원 초입에 있는 국립대만박물관)


 그리스풍으로 지어진 국립대만박물관(國立臺灣博物館)은 대만에서 가장 대표적이자 세계 4대 박물관 중에 하나인 국립고궁박물관(國立故宮博物館) 과는 다른 박물관이다. 하지만 1908년 일제에 의해 세워진 대만 최초의 박물관이라고 한다. 장개석이 중국에서 피난할때 같이 가져온 문물들은 이곳에 보지를 못하지만 대만의 지질, 문화, 원주민문화 등을 소개하고 있었다. 마침 내가 갔을때는 대만의 자연환경을 주제로한 특별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마치 자연사박물관에 온듯한 기분이 들었다. 또한 철도에 관련한 주제로 전시가 열리가 있어서 상당히 흥미롭게 봤다.


 국립대만박물관을 끼고 안으로 들어가면 228화평공원이 나온다. 겉으로 보면 시내의 한적한 공원으로 알 수 있으나  대만과 대만인들에게 가장 끔찍한 역사로 남겨진 '228사건'에 대한 추모공원이라고 할 수 있다. 



(228 화평공원과 추모탑)


 대만에는 여러가지의 민족계층이 있다. 첫번째는 대만에서 원래 살고 있었던 '원주민'과 두번째는 명, 청시기에 경제적인 이유로 이주해 온 '본성인', 마지막으로 1945년 대만의 통치가 일제에서 중화민국정부로 넘어간 이후부터 넘어온 '외성인'이 그것이다.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던 대만은 비교적 일본 사람들과 잘 지내고 있었다. 한번도 자신들의 나라를 가져본적이 없는 대만인은 5천년의 나라를 한순간에 빼앗겨버린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일제의 통치에 비교적 협조적이었다. (물론 원주민 단위에서는 항일 투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한 실용언어가 대만어와 일본어였을 만큼 어찌보면 중국과는 약간 다른 곳이었다.


 그러나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대만섬은 중국 국민당에게 인계되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곧바로 발발한 국공내전으로 인해 여유가 없어 이곳에 군인들을 보내 통치하게 하였는데, 이 통치방식이 구 일제의 통치방식보다도 못하고(....) 대만 행정 요직의 대부분을 원래 살아왔던 본성인과 원주민을 배제하고 중국에서 넘어온 사람 위주로 뽑기 시작하여 지식인들부터 점점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47년 2월 27일 밤에 한 할머니가 빌딩안에서 정부의 전매품이었던 담배를 불법으로 팔고 있자 담배주류공사 직원과 군인들이 단속하였다. 불법을 저질렀다는 이유만으로 군인들이 총신과 개머리판등으로 할머니를 구타하기 시작하자, 주변 시민들이 이에 분개하여 군인들과 충돌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군인이 발포하여 학생 1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다음 날인 2월 28일 이 소식을 들은 타이베이 시민들은 군 사령부와 경찰 본부에 몰려들어 항의하기 시작하였고, 행정장관은 이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발포를 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상자가 나오자 시위대는 더욱 분개하여 방송국을 점령해 대만 전 주민들이 봉기할 것을 요청했다. 결국 2월 28일부터 타이베이 시내에서는 파업과 철시, 시위등이 휩쓸었고 다음날은 3월 1일부터는 대만 각지에서 주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대만 주민들의 기세에 눌린 행정장관은 시위자들의 수습단체인 2.28처리위원회의 요구를 받아들여 4개 수습사항을 발표하였으나 이것은 행정장관이 시간을 벌려는 수작이었다. 동시에 대륙에 요청을 하여 국민당군이 3월 8일에 가오슝(高雄)에 상륙한 것을 시작으로 3월 11일에는 타이베이의 관문인 지룽(基隆)과 타이난(臺南), 3월 12일에는 자이(嘉義)에 상륙하여 무자비한 진압과 살육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3월 21일 사건진정을 위해 국방부장관이 올때까지 항거하던 본성인 3만명이 살해당했고, 대다수의 지식인 또한 살해, 처형, 행방불명, 투옥되었다.


 그 이후 2.28사건에 대해 논하는것 자체가 금기시 되었으나 1988년 본성인 출신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취임하자 공식적으로 언급이 되기 시작하였고 1995년에 공식적으로 유가족과 국민들에게 사과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97년 바로 228화평공원 및 기념관을 짓기에 이른 것이다. 


(228기념비 비문)





(228 기념관 전경)


(평화의 종)


 228 기념관에는 그때 일어났던 사건들과 그때의 희생자들의 명단이 너무나도 상세히 적혀져 있었다. 그리고 '세계인의 화평을 바란다.'는 비문이 여러가지 언어로 적혀있기도 하였다. 과거의 과오에 대하여 이렇게 처절하게 반성을 하고 기린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나도 부러웠다. 228사건 1년 후에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제주 4.3사건'과 1980년에 벌어졌던 '광주민주화운동'이 타이베이의 228기념관에서 느껴졌다. 대만정부는 자신이 벌어졌던 과오에 대하여 국민당 정권시기에 철저하게 반성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떻게 됐는지.. 끔찍한 살육을 벌여놓고도 '자신은 잘못이 없다.' 하고 배에 기름칠을 하고 계신 여러분들을 생각하니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빨갱이가 벌인 폭동이라고 일컫는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를 생각하니.. 과연 대한민국에는 미래가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들어 매우 씁쓸했다.


(228화평공원에서 나오면 바로 보이는 중화민국 총통부)


(중화민국 총통부(中華民國 總統府))


(대만의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


(총통부 바로 옆 상권)


(대만은행 본점)


(대만 외교부)


 228공원에서 나와 보니 엄청 큰 도로가 하나 있었고, 멀리에는 고풍스럽게 생긴 건물이 있었다. 바로 대만의 대통령이 일하는 '총통부'였다. (상식으로 대만에서는 대통령을 대통령이라 하지 않고 총통이라고 한다.) 원래 일본의 대만총독부였지만 1949년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천도하고 나서 지금까지 대통령궁인 총통부로 쓰고 있는 것이었다. 앞의 도로는 카이다거란(凱達格蘭)대도라고 불리는 길이었는데 1987년 계엄령이 철폐되기 이전에는 이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총통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 고개를 필히 숙이고 다녀야 했다고..(북한도 아니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청와대와는 달리 타이베이 시내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에 총통부 주변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상권이 형성 되어 있었고, 학교, 아파트 등도 꽤 있었다. 그래선지 시위대들이 접근하기가 매우 용이하여 특수한 복장을 입은 군인들이 앞에서 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총통부 바로 앞을 지나가면서 사진을 찍는데 그 아저씨들이 여기서 찍으면 안되고 길 건너서 찍으라고 할 정도였으니.. 게다가 옆 골목에서 소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가는길에 비가 조금씩 떨어져서 편의점에 들러 싼 우산을 산 다음 중정기념당으로 향하기 위해 총통부 반대방향으로 돌아나왔다. 총통부와 마주보고 있는 곳에 또다른 비가 서있었다.




(백색테러 정치수난자 기념비)


 국민당 정부는 대륙에 있을 때부터 자신의 위치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 공산당은 물론이고 공산당과 협력하는 국민당 좌파 계열들까지 정치테러를 자행하였다. 그리고 대만으로 패주해서도 1949년부터 1987년까지의 38년의 계엄령 기간을 거치며 수많은 정치테러를 자행하였다. 그래서 계엄령 이후에 이에 대해서 정부는 사죄를 하였고 총통부 앞에 기념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어찌보면 자신에게 매우 부끄러운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과하고 잊지 않기 위해 총통부 앞에 이러한 비까지 세우는거 봐서 대만의 정부는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통관저 뒤로 보이는 대만대학병원(臺大醫院))


(카이다거란 대도와 총통부)


(한국의 광화문 격인 경복문(慶福門))


(중정기념당 초입)


 총통부에서 중정기념관까지는 약 5분정도 걸리는거리이다. 카이다거란 대로를 따라 쭉 가다보면 우리의 광화문 격인 경복문이 나오는데 거기서 길을 건너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그림과 같이 엄청나게 큰 패방이 하나 나오는데 바로 그곳이 중정기념당이다. 


(중정기념당 정문인 패방)


(패방에서 본 중정기념당)


(엄청나게 넓은 자유광장)


(국가음악청(國家音樂廳))


(국가희극원(國家戲劇院))


(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


 자유광장이라는 패방을 지나서 보니 엄청나게 넓은 광장과 엄청나게 큰 하얀 건물이 나타났다. 바로 중정기념당이었다. 양옆에는 국가음악청과 국가희극원이라는 아주 큰 황금색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국립극장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만은 중국과 달리 국토가 좁기 때문에 큰 건물과 마당을 잘 볼수는 없는데, 이렇게 큰 건물과 광장을 만든것 보니 이건물을 축조할떄의 장개석의 입지를 알만 했다.


  1975년 4월 5일 중화민국을 50년간 철권통치하던 장개석이 만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처음에는 중국대륙을 호령했으나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하면서 대만으로 패주하기에 이른다. 이곳에 계엄령을 내리고 26년간 철권통치를 하다가 세상을 뜨게 된 것이다. 사후에 부총통이었던 엄가감이 3년간 총통 대행을 맡다가 그의 아들 장경국이 총통 자리를 계승하게 되었다.


 장총통 사후에 중화민국 정부는 장총통을 애도하기 위하여 기념당을 짓는 프로젝트를 실시하였고, 결국 장총통 5주기에 맞춘 1980년 4월 5일에 중정기념당을 개관하기에 이르렀다. 중정(中正)은 장개석의 본명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개석(介石)은 장중정의 자이며, 지청(志清)이라는 학교에서 쓰는 이름도 있었다.) 이 건물은 70m이며, 건물 2층에는 25t의 장개석 동상이 있다. 중정기념당 자체가 서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서북쪽에는 중국대륙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도 대륙 수복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 것 같았다.


 2000년 대만의 독립을 주장하는 민주진보당 정권으로 교체 되자 중정기념당을 한차례 큰 변혁을 겪게 된다. 장개석을 너무나도 끔찍이 싫어하는 민진당 천수이볜(陳水扁)총통은 중정기념당의 이름을 '대만민주기념관'으로 바꾸고 장개석 동상 옆에 데깔코마니 같은 예술작품을 전시하기도 하였다. 앞서 패방에 적혀 있던 자유광장이라는 표시도 2000년에 바뀐것이다. 원래 '대중지정'(大中至正)이라는 글이었다. 그러다가 2008년 다시 국민당 마잉주(馬英九)정권으로 교체되자 중정기념당의 이름은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중정기념당 1층)

 

(유물 전시관 앞의 장개석 흉상)


 당시 2층은 보수중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고, 중정기념당 1층을 들어갈 수 있었다. 마침 달리 전시회와 공룡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고 금요일 저녁쯤 됐을 때라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미술 전시관 앞으로는 장개석 유물 전시관이 있었는데, 궁금해서 들어가보기로 했다. 


(장총통의 차)


(장개석 총통의 사진자료가 정말 많이 있었다.)


(중앙에 있는 젊은 장개석과 손문)


(큰 아들이자 후임 총통인 장징궈(장경국, 蔣經國))


(중정기념당 한 방은 장개석 총통 집무실을 재현시켜놨다.)


 차도 두대가 전시가 되어 있었고 넓은 유물관에는 장총통이 썼던 유물들과 사진들 그리고 각 나라에서 받은 훈장들이 쫙 전시가 되어 있었다. 그 중 내 눈을 끄는 것이 있었으니...


(대한민국 건국훈장)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장개석 전 총통)


 한국과 관련된 유물과 사진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1953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장개석 총통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수여했다고 한다. 그 훈장이 중정기념당에 전시되어 있는것.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에 방문한 장개석 총통과 만찬을 갖는 사진도 전시가 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중정기념당 전시실 안에는 많은 유물과 문서 그리고 사진이 있었다. 하지만 비록 독재시대때 지어진 건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독재자에 대해 이렇게 대우 하는 것을 보니 좀 머릿속이 혼란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소남문)


(시먼딩 (西門町))


 중정기념당에서 시먼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전철을 타고 가기에는 복잡하고 걸어가기에 알맞았기 때문에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사실 총통부를 거쳐서 가는 방법이 가장 가까우나 잘못하고 충칭난루(重慶南路)로 걸었다. 굉장히 중요한 건물이 많은 것 같았다. 재정부와 행정원이 보였고, 소남문 근처에는 경비서는 군인들이 매우 많아서 알아보니 국방부가 그곳에 있었다. 사진을 찍었는데, 뒤에서 헌병들이 나와서 찍지 말라고 하더라.. 시 중심에 그렇게 헌병들이 있고 군인들이 있는 것이 매우 좀 그랬다. 마치 용산에 온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시먼(西門)에 도착했다. 시먼은 원래 타이베이 성 서문 자리로 현재는 한국의 명동 같은 곳이다. TV 같은 곳에도 예능 프로에서 이곳에 다니는 사람들을 붙잡아서 퀴즈도 맞추고 그러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곧이 곧대로 우리나라의 명동을 생각하고 시먼딩을 가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보다 규모는 적다고 보면 된다. 시먼으로 가는 초입에 붉은 건물이 있었는데, 그 건물은 바로 홍루(紅樓)라고 하는 건물이었다.


(시먼딩(西門町))


(시먼 홍러우(서문 홍루, 西門紅樓))


 홍루는 일제시기인 1908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8각형 건물인데 계속 극장으로 쓰였던 건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970년대에 극장이 문을 닫았고 이 건물은 1997년까지 방치 되어 있다가 타이베이 내무부에서 이건물을 매입하여 영화박물관으로 꾸몄지만 3년만에 큰 화재가 일어나 다시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2002년에 복원하여 민간에서 극장으로 운영을 하였다가 2007년부터는 문화창의공간으로 꾸며져서 우리나라의 인사동 쌈짓길과 같은 곳으로 변모하였다. 


(홍루 내부)


(홍루 로비의 카페)


(홍루에서 파는 여러 물건들)


(홍루의 역사를 담은 유물들)


사실 홍루 내부에는 별게 없을 줄 알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간 홍루는 내 예상과 달랐다. 16공방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는 곳에서는 우리나라의 쌈지길과 같이 특이한 옷도 팔고 장식품과 악세사리도 직접 만들어서 팔고 있었다. 몇개 사고 싶었지만 비용이 좀 비싸서 사지는 못한게 아쉬웠다. 하루종일 걸어다녔기 때문에 휴식을 하기 위해 홍루 로비에 차려진 까페에 가서 시원한 우롱차 한잔 시키고 앉았다. 우롱차를 한모금 들이키고 나니 정말 그동안 몰려왔던 피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 했다.


 홍루를 나와서 국방부박물관에 가려고 했으나 폐관시간이 넘어서 바로 용산사로 향하기로 했다. 지도를 보니 거리도 그다지 멀리있지 않은 것 같아서 걸어서 이동을 했다. 하지만 타이베이의 거리는 매우 좁기로 유명한데;;;; 그걸 간과하고 다니다가 직진 해야할 것을 좌회전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길을 조금 헤매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 희한한 곳을 발견하게 되었다. 


(박피료 노가)


바로 타이베이의 옛 거리를 재현해 놓은 곳이었다. 원래는 이곳에서 가죽세공업을 하던 곳이 많았다고 하는데, 타이베이시에서 이 공간을 그대로 남겨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또 실습장도 만들어 놔서 지역주민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가 5시에 문을 닫아 -_-; 제대로 구경을 할 수는 없었지만 시내 한복판에 이러한 공간이 있다는 것이 매우 신기했다.


결국 걸어걸어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용산사에 도착했다.



(용산사 정문)


(용산사 인공폭포)


(봉헌할 향과 초를 사는 곳)


(촛대)


(용산사 내부 풍경)








(봉헌된 여러 주전부리들)




(기도하는 사람들)


 용산사(龍山寺)는 대만에서 아주 유명한 사찰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80년전인 청나라 시기에 푸젠성 취안저우(福建省 泉州)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이 대만으로 이주하면서 세운 사찰이다. 이곳말고도 대만에는 용산사라고 불리는 사찰이 상당히 많은데 대부분 관음보살을 모신 사찰인 경우가 많고, 이곳 역시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그래도 대만의 고유 신앙과 또 마쭈 신앙과 결합하여 공동으로 치뤄지는 예식도 있고 분위기도 비슷하다.


 용산사 안으로 들어가니 명성답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향을 사르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어떤 분은 경전을 읽으시기도 하셨는데 이렇게 소란스러운 곳에서 과연 글자가 눈에 들어올까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각자 왁자지껄함 속에서도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아보였다. 


 특히 사람이 많이 몰린 곳이 있었는데, 바로 문창대군을 모신 곳이다. 문창대군은 공부와 학문을 관장하는 신으로써 이곳에서 자식들의 학업성취를 바라는 부모님들과 아이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나도 천주교 신자긴 하지만 종교 화합의 마음을 담아서 향을 사르기도 하였다.


 원래 이곳 주변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야시장이다. 용산사 주변 야시장은 예전에는 뱀탕과 뱀술로 상당히 유명한 곳이었고, 한때 뱀을 잡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의 관광 상품화가 된 적도 있었단다. 하지만 시대가 변한지라 그렇게 하는 것이 배척을 받게 되고 또 당국에서 검속을 심하게 하여 그것은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여전히 용산사 야시장은 굉장히 유명했다.


 더 구경을 하고 싶었지만 너무 오래 걸어다닌 탓에 피로가 마구 몰려왔다. 도저히 더 다니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지하철을 타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바로 골아떨어졌다.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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